"프레스센터 언론자유 조형물, 과거·현재·미래 아우를 표상 돼야"

[기고] 고승우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 공동대표

고승우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 공동대표.

▲고승우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 공동대표.

한국기자협회와 전국언론노조, 한국PD연합회 등 언론 3단체가 프레스센터 앞에 언론자유를 상징하는 조형물을 설치하기 위한 추진위원회를 발족한 것은 모두가 환영할 의미 있는 일이다. 언론자유는 표현의 자유와 함께 민주주의를 가능케 하는 가장 소중한 기본권의 하나이고 이는 사회 전체가 보호하고 가꾸어야 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조형물은 진정한 언론자유의 철학을 담아내는 상징성을 지녀야 한다. 정치적 자유 등 다른 모든 자유를 견인해 내는 언론자유의 표상이어야 한다. 그것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언론자유를 아우르는 탈 시대적 표상이어야 한다.


조형물이 들어설 프레스센터 앞은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절 언론자유를 외치던 언론인들의 집회 현장이었다. 촛불혁명의 불길이 타오르면서 공영방송 정상화를 촉구하는 언론인들의 집회가 열리기도 했었다. 그러나 프레스센터 앞은 지금과 같은 높은 건물이 들어서기 전인 1980년, 해방 이후 최악의 언론 탄압과 언론 저항이 벌어진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전두환 신군부의 광주학살에 항거해 전국 언론인들이 검열, 제작거부를 결의한 곳이 바로 프레스센터 앞에 있었던 3층 건물 신문회관이었다.


1980년 봄 신문회관 2층에 있던 한국기자협회는 군정을 끝장내고 언론자유를 회복하자는 전국적 투쟁의 일정표를 만들었던 역사적 현장이었다. 기자협회는 언론자유를 보장하는 새 헌법 시안 작성, 전두환 신군부가 정권 찬탈 수단으로 악용한 검열 철폐, 유신언론인 퇴진 등을 주장하고 전국 언론사들이 검열 철폐를 벌이기로 결정하는 데 앞장섰다. 신군부의 광주학살이 자행되던 공포 분위기 속에서 전국 언론인들은 5월20일부터 27일까지 검열, 제작 거부를 벌였다. 당시 신군부는 주요 언론사 앞에 장갑차를 배치하고 전두환이 언론 사주들을 불러 ‘쓸어버리겠다’고 협박했지만 언론인들은 굴하지 않았다.


전두환은 광주 항쟁 후 저항 언론인들을 포함해 1000여명을 불법해직한 뒤 언론사 통폐합, 언론악법 제정, 보도지침 등을 통해 언론을 철저히 통제했다. 이어 전두환은 1984년, 언론인 투쟁 현장의 산실이었던 신문회관을 허물고 세운 프레스센터의 소유권을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코바코) 앞으로 등기해 ‘언론계의 공동자산’이었던 장소의 건물을 광고판매회사의 소유물로 전락시켰다. 언론인들의 공동체가 만들어질 소지를 원천 봉쇄한 것이다. 전두환이 언론에 가한 일련의 행위는 광주항쟁 당시 광주일원을 제외하고 신군부에 저항한 언론인들 투쟁이 재발할 소지를 원천 봉쇄하겠다는 폭압적 만행이었다.


전두환이 신문회관을 헐어버리고 프레스센터를 만든 지 30여년 만에, 해방이후 최초로 전국 언론사가 하나가 되어 투쟁한 기폭제를 제공한 신문회관 부지에 민주언론 조형물을 만들기로 언론 3단체가 합의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돌이켜 보면 한국 언론은 부당한 권력의 탄압과 억압에 대한 투쟁의 과정이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이명박, 박근혜 등으로 상징되는 반민주적 정치권력은 언론을 장악해 권력의 나팔수로 전락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런 과정에서 언론인들의 가열찬 투쟁이 이어져 왔다. 하지만 아직도 언론자유는 미완의 상태다. 더 가다듬고 더 정교하게 만들어야 한다.


언론자유 투쟁은 해방 이후 수십 년 째 이어지면서 시대마다 투쟁의 방식은 달랐지만 목표는 하나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언론인들이 겪은 고통과 분노, 투쟁, 좌절, 부분적 승리 또한 면면히 이어져 왔다. 이런 언론자유 쟁취 노력이 동일한 무게로 상징물에 담겨야 한다. 언론인 투쟁의 상징이었던 신문회관 자리에 세워질 언론자유 조형물은 진보, 보수의 차이를 떠나 교과서적 언론자유를 상징하는 표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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