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속에서나 존재하는 혁신

[글로벌 리포트 | 미국] 손재권 매일경제 실리콘밸리 특파원

손재권 매일경제 실리콘밸리 특파원.

▲손재권 매일경제 실리콘밸리 특파원.

“글로벌 생태계가 중요하다” “플랫폼 사업을 해야 미래를 장악한다”


서울 광화문 대형 서점에 있는 베스트셀러 책 제목이 아니다. 혁신을 배우기 위해 미 실리콘밸리로 연수 온 국내 한 대학생의 말이다. 깜짝 놀랐다. ‘생태계’ ‘플랫폼’이란 말은 대기업 임직원의 미래 전략 보고서나 기사 속에서 등장하는 단어가 아니라 대학생 리포트, 심지어 고등학생 대입 논술 준비 지문에도 등장하는 주제라는 것이다.


하지만 알고 있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다르게 보인다. 한국의 현실을 보면 생태계 전략과는 거리가 멀고 플랫폼 사업과도 동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행동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많다.


실리콘밸리 특파원을 2년 이상 재임하면서 글로벌 기업의 인수합병, 제휴, 합종연횡, 투자 유치, 상장(IPO) 등 경제 산업 활동에 대한 많은 기사를 써왔다. 요새처럼 변화가 빠른 시기엔 국가도, 기업도, 개인도 생존을 위해 재빠르게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애플, 아마존, 구글, 넷플릭스, 마이크로소프트(MS), 우버, 에어비앤비 등이 내놓는 혁신 서비스와 제품에 눈 돌아가고 그들이 창출하는 새로운 산업과 일자리를 보면 부러운 감정도 든다. 반면 장난감 유통의 대명사 토이저러스에 이어 한때 백화점의 상징과도 같던 시어스, 대기업의 아이콘이었던 GE가 이미 파산했거나 그룹 해체의 위기에 몰린 것을 보면 2018년 이후 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 격변의 시기를 겪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으로 1~2년의 변화가 지난 10~20년의 변화보다 더 크고 깊게 다가올 것이다. 지난 2년만 봐도 정치, 사회, 산업, 지정학적 상황 모두 크게 바뀌었다.


최근 일본 자동차 회사 혼다와 미국 GM이 협력하기로 한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혼다가 GM의 자율주행차 부문 자회사 크루즈홀딩스에 12년간 27억5000만달러(약 3조1400억원)를 투자하고 지분을 획득하기로 했다는 소식이었다. 곧이어 토요타도 소프트뱅크와 합작회사를 설립하고 20억엔(약 200억원)을 투자한다고 발표했다. 유튜브를 통해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과 도요다 아키오 토요타 회장의 기자회견을 직접 시청했는데 절박함과 야심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왜일까. 인공지능 기반 자율주행차는 당초 계획보다 개발, 상용화가 어렵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한 회사의 자원, 인력으로는 문제를 풀 수가 없다. 제휴를 통해 더 큰 판을 만들고 공동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비슷비슷한 회사끼리 경쟁하기보다는 기술 개발 플랫폼을 만들고 시장을 크게 키워서 더 크게 나눠먹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는 것이다.


우버, 디디추싱, 그랩 등 모빌리티 산업의 급성장이 이합집산을 가져오고 투자를 이끌기도 했다. 택시 기사 밥그릇을 지키는데 시간과 자원을 투입하기보다 국민, 시민들의 편의성을 증진하고 기술 개발을 독려하니 수십조 단위의 투자가 집행된다. MS가 동남아 모빌리티 업체 ‘그랩’에 2억달러(2276억원)를 투자한다고 발표했는데 한국이 우버 같은 서비스가 있었고 발전했다면 이 투자금이 한국으로 오지 말라는 법은 없었을 것이다.


자율주행차 및 모빌리티 산업뿐인가. 인공지능, 헬스케어 바이오, 우주개발, 블록체인 모두 글로벌 합종연횡, 제휴, 생태계에 한국 기업들은 대부분 빠져 있다. 미디어 및 글로벌 저널리즘 분야에서도 언론 자유, 가짜뉴스 방지, 글로벌 탐사보도, 인공지능으로 인한 편향성, 플랫폼 자율성 등 글로벌 이슈에 한국 언론계가 목소리를 냈다는 소식은 들어 보기 힘들다. 글로벌 미디어 산업 및 저널리즘 발전, 생태계 지형에 한국 언론계의 기여도는 턱없이 낮다고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한국 정부, 산업계는 혁신이 아직 절박하지 않기 때문일까. 글로벌 생태계 일원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자본, 흐름의 관심을 끌지 못하면 투자를 받지 못하고 성장 가능성이 낮아지며 그토록 원하는 일자리 창출도 원하는 대로 이룰 수 없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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