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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 들지 않은’ 예멘 기자는 남의 나라를 전전해야했다

제주 ‘난민 기자’ 하니·무니르

최승영 기자2018.07.11 15:09:42

예멘 신문기자였던 하니와 무니르는 난민이 됐다. 이들은 “기회가 된다면 여기서든 전쟁이 끝난 예멘에서든 기사를 쓰고 싶다. 저널리즘이 내가 아는 전부다”라고 말했다. 사진제공=조혜림 코리아헤럴드 기자

▲예멘 신문기자였던 하니와 무니르는 난민이 됐다. 이들은 “기회가 된다면 여기서든 전쟁이 끝난 예멘에서든 기사를 쓰고 싶다. 저널리즘이 내가 아는 전부다”라고 말했다. 사진제공=조혜림 코리아헤럴드 기자


기자로 살았다. 내전이 일어났다. 정부군인지 반군인지, 편을 선택하지 않은 기자는 양쪽 모두에 눈엣가시가 됐다. 하니(37)와 무니르(45)는 그런 기자였다. 몸 담았던 신문사마저 폐간되면서 도망치는 것 말고 남은 선택지는 없었다. 가족을 떠나 타국을 전전했다. 죽지 않으려면 그래야 했다. 지난 5월 제주에 들어온 두 기자는 그렇게 ‘난민’이 됐다.


지난 4일 제주시 오라1동 시외버스터미널 인근 카페에서 만난 하니와 무니르는 예멘에서 같은 신문사 기자로 근무한 동료 사이였다. 회사 이름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거리의 신문’ 쯤이 된다. 신문 한 부를 열 사람이 돌려보는 예멘에서 약 2만부를 찍었고, 2015년 8월6일 폐간되기 전 최대 신문사였다고 둘은 설명했다. 1990년 통일 이후에도 예멘에선 내전이 끊이지 않았지만 ‘아랍의 봄’ 이후 언론이 권력의 타깃이 됐고, 이들은 그 중 하나였다.


“2014년쯤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회사에 불을 질렀다. 협박 전화와 문자가 오는 건 다반사고, 건물에 총을 쏘고 돌도 던졌다. 신문발행을 중단하지 않으면 다음엔 ‘네 머리 차례’라는 거다. 특히 우리는 정치 세력 한쪽을 편들지 않아 어느 쪽 보호도 못 받았다. 너무 무기력하고 취약했다.”(무니르)



2014년 9월 이란 지원을 받는 후티 반군이 수도 사나를 점령하면서 내전이 본격화됐다. 3년 넘게 지속된 전쟁으로 1만명 넘는 사람이 숨졌다. 언론은 탄압 받았고, ‘표현의 자유’는 금지됐다. 편들지 않는 이들은 고문당하거나 생사를 알 수 없게 되는 일이 비일비재해졌다. 하니는 무장세력에 납치돼 고문을 받은 당사자이기도 하다. 그는 반군이 16세 소년을 살해했다는 기사를 쓰고 살해 협박을 받았다. 정부군 장악 지역 에덴으로 도망가 특정 단체에 의탁, 정치의견을 계속 피력하던 그는 모두에게 미움을 받았다. 하니는 “정부군, 반군, 종교단체 아무도 진실을 말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침묵을 바란다”고 말했다. 암살 당한 조직 리더의 장례식장에서 하니는 동료 기자 2명과 함께 납치됐다.


“(날 납치한 건) 군부 출신이 우두머리로 있는 종교 단체였다. 주먹으로, 발로, 몽둥이로 때리고, 전기고문을 했다. 팔과 다리를 다 묶은 상태로 무릎을 꿇리고 총을 머리에 겨눴던 기억이 생생하다. ‘마지막은 칼이 아니라 총이기를’ 바라기도 했다. 정당과 연관이 있고, 무신론자라고 인정하는 서명을 강요했고 거부하면 계속 고문을 했다.”(하니)



하니는 앰네스티 인터내셔널과 다른 기자, 시민들의 석방요구로 풀려놨고 이후 지난해 6월 이집트로 도망쳤다. 제주로 오기 전 1년여 간 이집트 도피 시기에도 그는 동료 기자가 감금 고문을 당한 끝에 초주검 상태로 풀려났다가 이틀 만에 사망했단 소식을 페이스북에 올리기도 했다. 무니르는 신문사 폐간 후 위협 때문에 두 달 간 거처를 옮기는 생활을 하다 공항이 열리자마자 유일하게 갈 수 있었던 항로, 요르단행을 거쳐 2015년 10월에 말레이시아로 갔다. 다음은 우리가 아는 대로다.


도대체 무엇을 잘못해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것일까. 대학에서 저널리즘(무니르)과 사회학(하니)을 공부하며 기자의 꿈을 키웠던 것부터 잘못이었을까.


“예멘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데 도움이 되고 싶었다”는 첫 마음이 문제였을까. “뉴스와 함께 눈뜨던” 청년 무니르는 통일 후 처음으로 자유가 생겼고 신문사 창간이 빗발치던 1992년 언론계에 입문해 폐간 전엔 ‘긴급 문자뉴스 서비스 담당 등 뉴스 에디터’를 맡았다. 로맨틱한 시를 쓰던 ‘문청’ 하니는 “약자를 위해 뭔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다 2009년 기자가 됐고 ‘전쟁지역’을 커버하며 부패관료 고발 등 특종·탐사보도를 해왔다.


두 기자는 난민 반대 정서를 아냐는 질문에 “안다. 미국·유럽 관광객과 달리 만나기 쉽지 않으니 4~5명이 모이기만 해도 무섭게 느껴질 거다. 죽고 죽이는 전쟁뉴스, 극단주의 종교 단체의 사건사고 소식만 접하니 더 안 좋게 보일 것”이라며 “좁은 지역에 다 있으니까 더 그리 느껴질 텐데 언젠가 이해해줄 거라 희망적으로 본다”고 했다.


기자들에게는 “언젠가 난민이 될 수 있다는 걸 생각해보면 좋겠다. 1950년대 남한도 그렇지 않았나. 예멘도 전쟁 전 소말리아 등 아프리카 난민 100만 이상을 받아들였다. 우린 서로 도와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들은 여기저기 거처를 옮겨 다니다가 현재는 제주시 인근 교육센터 교실 한 칸에서 20여명이 함께 기거하고 있다. 두 기자는 아직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 하니는 고문 후유증으로 허리가 불편해 병원에 다닌다. 인터뷰 중에도 똑바로 계속 앉아있기 어려워했다. 무니르는 요즘 번역자 꿈을 꾼다. 소설 ‘채식주의자’의 아랍어판을 최근 읽고, 한국어 공부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다시 기사를 쓰고 싶은 생각은 없을까. “물론이다. 당연하다. 기회만 된다면 여기서든 전쟁이 끝난 예멘에서든, 그러고 싶다. 그게 내 일이니까. 저널리즘이 내가 아는 전부다.”

최승영 기자 sychoi@journalist.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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