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중(反中) 탈을 쓴 반정부 시위

[글로벌 리포트 | 베트남] 정민승 한국일보 호찌민특파원

사람들의 관심이 온통 6·12 북미 정상회담과 6·13 지방선거에 쏠려 있던 지난달 초. 베트남에 거주하는 교민, 주재원 사이에서는 카카오톡 메시지 하나가 빠르게 돌았다. 오는 주말 하노이, 호찌민, 다낭, 냐짱 등 도시에서 대규모 ‘반중(反中) 집회’가 벌어질 것으로 예상되니 위험 지역 접근을 자제하라는 내용이었다. 수도 하노이시는 오페라 하우스와 호안끼엠 호수 주변, 남부 호찌민시에서는 노트르담 성당과 응우옌 후에 거리 등이 구체적인 장소로 언급됐다.


시위 배경으로는 베트남 정부가 추진하는 경제특별구역 조성과 관련한 법안. 정부가 중국 등 외국인 투자자의 토지 임차기간을 50년에서 최장 99년으로 늘리는 법안을 다루고 있는데, 이것이 중국에 대한 특혜 내지는 나라 땅을 팔아먹기 위한 움직임으로 해석돼 국민들이 반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최악의 경우 4년 전 발생한 소요 사태 수준까지 이를 수 있다는 대목 탓이었는지, 메시지는 복제돼 여러 군데서 며칠 동안 날아들었다. 현지서는 그 만큼 긴박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기업들 사이서는 정문에 한국 국기와 함께 베트남 국기를 함께 내걸고, 중국 기업으로 오인될 수 있는 한자를 모두 떼내는 등의 대책이 나왔다. 또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중국 직원과 현지 직원들을 격리시키는 방안도 제시됐다. 베트남 진출 기업인들에게 2014년은 ‘악몽’과도 같다. 당시 베트남과 영유권 분쟁을 벌이던 파라셀 군도 인근 해역에 중국이 석유 시추장치를 설치하면서 발단이 된 반중 시위다. 폭도들이 중국 기업은 물론 대만, 한자를 내걸고 있는 한국, 일본 기업들까지 무차별 공격했다. ‘무법천지’ 속에서 기업들은 두 달 동안 떨어야 했다. 당시 베트남 정부는 대중국 견제 수위를 높이기 위해 반중 시위에 적극 개입하지 않았고, 거칠게 표출된 국민들의 반중감정을 이용했다는 분석도 있다.


당시의 일 때문에 대부분의 언론들이 ‘반중시위’로 쓰긴 했지만, 베트남 국민들이 반발하고 있는 지점이 토지 임차기간을 늘리는 ‘법안’ 때문이라면 이것은 그 법안을 추진하는 정부를 향한, ‘반정부’ 시위가 맞는 표현이다.


사회주의 국가, 베트남에서 정부를 상대로 한 시위가 가능한가. 베트남 헌법(25조)은 국민들이 언론, 정보접근 집회, 결사, 시위에 대한 자유를 가진다고 명시하고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전에 허가를 받은 경우로 제한되는 점을 감안하면 불가능하다. 오랫동안 장기 거주한 교민, 주재원들도 ‘반정부 시위, 이른바 ‘데모’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전망이었다.


그러나 문자 메시지가 예고했던 대로 주말에 시위는 전국에서 일어났다. 하노이 호안끼엠 호수 주변과 호찌민시 인근의 동나이성 등의 산업단지, 푸꾸옥 섬 등지에서 수십 명부터 수천 명에 이르는 시민이 ‘중국, 물러가라’고 적힌 피켓, 펼침막을 들고 거리 시위를 벌였다. 베트남에 진출한 일부 한국기업들도 일부 기물 파손, 조업 중단 사태 등의 피해가 잇따랐다.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를 확인한 응우옌 쑤언 푹 총리는 “최종 법안을 국회에 제출하기 전에 경제특구 토지 임차기간을 적절히 줄이겠다”며 한발 물러섰다. 국민들의 반발로 추진하던 정책이 차질을 빚은 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경우다.


베트남 정부 측에서는 불만이 상당하다. 경제특구 법안에 ‘중국’이라는 단어는 물론, 그 어디에도 중국을 특정한 표현은 없기 때문이다. 푹 총리는 “법안 내용에 대한 오해가 있는 것 같다”며 “토지임대는 정해진 기간에만 가능한 것이지 무기한 가능한 게 아니다”고 했지만, 곧이곧대로 듣는 이들은 많지 않다. 베트남 정부도 이번 일이 ‘법안 내용에 대한 오해’에서만 비롯된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내부에 반정부 세력이 있으며, 그들이 반중 정서에 편승해서 국민들을 선동해 사익을 취하는 등 다른 일을 기도한 것으로 보고 있다.


현지 언론들은 사태와 관련 연행돼 조사를 받은 이들이 상당수 마약 전과자, 실업자라는 사실을 전하면서 해당 이슈에서 재빠르게 발을 빼고 있다. 대신 자연재해나 환경오염 같은 다른 현안 보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한달 전 시위대 통제에 사용됐던 철조망 바리케이트들은 아직도 시내 곳곳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그 앞을 무심히 지나가지만, 베트남 정부가 얼마나 놀랐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반중 시위의 탈을 쓴 반정부 시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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