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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그 때로 돌아간다면, 우리는 제대로 보도할 수 있을까

세월호 참사 4주기…‘세월호 기수’ 기자들의 이야기

강아영 기자2018.04.10 20:07:09

2014년 4월16일 세월호가 바다에 가라앉은 후로 4년이 흘렀다. 취재를 위해 팽목항과 진도체육관을 전전하던 기자들의 기억도 4년 전 것이 됐다. 기자들에게 세월호는 고통스러운 기억이다. 사진은 4년 전 진도 팽목항 민간 잠수부 구조대 천막 벽면에 생존을 기원하는 메시지가 가득한 가운데 한 기자가 남긴 안타까운 심정.

▲2014년 4월16일 세월호가 바다에 가라앉은 후로 4년이 흘렀다. 취재를 위해 팽목항과 진도체육관을 전전하던 기자들의 기억도 4년 전 것이 됐다. 기자들에게 세월호는 고통스러운 기억이다. 사진은 4년 전 진도 팽목항 민간 잠수부 구조대 천막 벽면에 생존을 기원하는 메시지가 가득한 가운데 한 기자가 남긴 안타까운 심정.

다시 4월이다. 곳곳에 일렁이는 노란 물결은 304명의 이름과 함께 세월호를 망각의 기억에서 건져 올린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4월은 기자들에게 잔인한 계절이다. 언론은 그 사명인 진실에 눈 감은 채 뉴스거리만 좇았다. 그해 4월, 진도군 초입엔 노란 유채꽃이 하늘거렸다. 종합일간지 A기자는 4년 전, 그날을 회상했다. “세월호 참사가 터지고 회사 차 타고 내려가는 길이었어요. 진도 초입에서 너무 예뻐 서글프기까지 한 유채꽃 무리를 봤죠. ‘남도에는 봄이 왔는데 왜 이런 잔인한 일이 벌어졌을까’ 생각에 잠겼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2014년 4월16일 세월호가 바다에 가라앉은 후로 4년이 흘렀다. 취재를 위해 팽목항과 진도체육관을 전전하던 기자들의 기억도 4년 전 것이 됐다. 누군가에게 희미하게 남은 기억은, 다른 누군가에겐 아직도 생생하고 쓰린 기억으로 남았다. ‘세월호 기수’라고 불리는 이들에게 특히 그랬다. 인터넷매체 B기자는 자신을 세월호 기수로 표현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수습기간이 끝나고 얼마 안 됐거나 수습기간에 세월호 참사를 겪었던 기자들’이 세월호 기수다. 당시 1~2년차였던 세월호 기수는 현장에서 유가족의 목소리를 가장 가까이 들으며 그들의 아픔을 날 것 그대로 목격했다. 기자협회보는 세월호 기수였던 기자 4명의 얘기를 들었다.


울면서 취재했던 세월호 기자들


세월호 참사가 벌어진 16일로부터 하루에서 나흘의 간격을 두고 4명의 기자들은 모두 팽목항으로 달려갔다. 골든타임을 운운하던 때, 현장은 희망과 좌절이 뒤섞인 아수라장이었다. 기자들 역시 정신없기는 매한가지였다. 종합일간지 C기자는 서둘러 내려가느라 씻지도, 옷을 갈아입지도 못한 채 자신을 맞이한 차량 수송 ‘형님’의 냄새를 맡으며 자신의 운명을 직감했다. 방송사 D기자는 언론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 찬 유가족의 분노를 온 몸으로 느끼며 일거수일투족을 조심해야 했다.


이들 대부분은 팽목항에 설치된 화이트보드 앞에서 사망자 명단을 확인했다. 수습된 시신의 생김새와 옷가지 등이 쓰여 있는 보드였다. 기자들은 몇 구의 시신이 발견됐는지, 그 중 신원이 확인된 시신은 얼마나 되는지 등을 수시로 살폈다. 보드 앞은 항상 울음바다였다. D기자는 “특이점이라고 할 만한 게 머리 길이나 키, 아니면 옷과 신발의 브랜드였는데 브랜드 옷을 사주지 못한 부모들은 특히 더 힘들어했다. ‘나이키 운동화’가 아니라 아무 특이점이 없는 ‘흰 운동화’가 쓰여 있으면 그것만으로 울었던 유가족이 아직도 생각난다”고 말했다.


기자들은 취재수첩이나 카메라를 꺼내지 못한 채 근처를 배회했다. 나이가 있거나 옷에서 신분이 드러나는 경찰, 자원봉사자를 제외하면 젊은 얼굴은 대부분 기자였다. 유가족들은 젊은 얼굴을 한 기자들을 천막 근처에도 못 오게 쫓아냈다. 


C기자는 바다 근처에 설치된 컨테이너 뒤 좁은 공간에서 많은 시간을 머물렀다. 적대감 어린 시선에서 벗어나 마음을 안정시키는 곳이었다. B기자도 먼발치에서 유가족들을 살폈다. 극단적인 상황이 계속해 벌어졌다. 21일에서 22일로 넘어가는 새벽이 특히 그랬다. 20구가 넘는 시신이 한꺼번에 들어왔다. 신원을 확인하러 달려왔다가 맞으면 그대로 오열하고, 아니면 그게 슬퍼서 또 흐느끼는 유가족들을 수십 명 본 날이었다. B기자는 “천막 밖으로 새어 나오는 울음소리와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며 담배를 무는 모습, 어머니가 쓰러져 부축돼서 나오는 장면을 기록하는 건 수습을 갓 뗀 신입 기자가 감내하기엔 힘든 일이었다”고 말했다. “많은 기자들이 울며 취재하고 마음의 상처를 입은” 때였다.  


2014년 4월19일 오전 진도 팽목항에서 정부 관계자가 브리핑에 나서자 기자들이 취재에 나섰다. 팽목항 대합실 옥상에도 취재진들이 즐비해 있다.

▲2014년 4월19일 오전 진도 팽목항에서 정부 관계자가 브리핑에 나서자 기자들이 취재에 나섰다. 팽목항 대합실 옥상에도 취재진들이 즐비해 있다.


악다구니가 아니라 공감·경험 필요한 현장이었는데


언론사는 그러나 이들을 몰아붙였다. 기자 생활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대형 참사였다. 큰 사건에 흥분을 주체하지 못한 건 현장에 있는 기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이들에게 지시를 하는 윗선이었다. A기자는 다들 속보와 단독 압박에 시달렸다고 말했다. 무리하게 취재하다 휴대폰을 뺏겼던 종합편성채널 모 기자의 소문을 언급하며 “그 사람이 인격적으로 쓰레기라 그런 취재를 한 걸까? 뉴스룸에서 뭐라도 가져오라고 취재경쟁을 시켰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라고 말했다. 기자들은 이중고에 시달렸다. 힘들어하는 유가족들을 지켜보면서도 그들에게 기사거리를 찾아내야 했다. A기자는 현장을 “목불인견(目不忍見·눈으로 참고 보기 어려움)”으로 표현했다.


사연은 재차 강조됐다. 유가족의 절절한 사연을 가져오는 기자는 능력 있는 기자였다. 누가 ‘물을 먹었는지’ 확연히 알 수 있는 기사이기도 했다. C기자는 “현장에 내려가고 이틀 후에 팀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리 신문에서 사연 기사에 물을 많이 먹었다고 안에서 지적이 나왔다면서 압박을 하는 전화였다”며 “보다 못해 열 받은 한 선배가 아침에 각자 할당 인원을 정해 유가족 멘트를 따라고 했다. 그쯤 유가족도 희망을 잃고 힘들어하던 시기였는데 어렵게 멘트를 따다 결국 할당 인원을 못 채워 우울해했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어린아이를 두고 사연을 취재하는 무리수가 만연하던 시기였다. A기자는 중앙과 현장의 소통이 끊겼기 때문에 이 같은 참사가 나타났다고 지적했다. ‘면 5개 비워놨으니 알아서 채워라’는 지시보다 노련한 기자가 내려와 사안을 판단하고 현장기자들을 격려해야 했다고 말했다. A기자는 “백발의 외신 기자가 리포트를 하러 현장에 나타난 적이 있다. 그에 비해 한국 기자는 아직 결혼도 안 한 젊은 기자만 가득했다”며 “기본적으로 자식을 낳아본 적도 없어 유가족의 고통을 100% 공감하지 못 하는 기자들이었다. 세월호는 악다구니가 아니라 공감과 경험이 필요한 현장이었다”고 말했다.   


2014년 4월19일 진도체육관에서 실종자 가족과 취재진들이 이날 공개된 침몰 해역 영상에 집중하고 있다.

▲2014년 4월19일 진도체육관에서 실종자 가족과 취재진들이 이날 공개된 침몰 해역 영상에 집중하고 있다.


4년 지났지만 관행 여전


보도 참사로 불리는 그 기억은 그러나 숙제로만 남겨졌다. 무리한 속보와 단독경쟁은 4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하다고 4명의 기자들은 입을 모았다. B기자는 “당시 가장 문제가 됐던 게 속보경쟁이었지만 지금도 여전히 언론사들은 정확성보다 빠르게 기사를 내보내는 것을 중시하고 있다”며 “특히 포털이 기사의 질보다 속보를 위주로 메인에 잡아주지 않나. 포털 중심의 생태계에선 아마 이 같은 악순환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C기자는 오히려 최근 들어 사실관계 확인이 더 소홀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누군가의 폭로가 상대방의 반박 없이 그대로 보도된다는 것이다. C기자는 “기자는 어떤 사람의 얘기를 전달하는 역할에 불과하기 때문에 반론 없이 내보내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기자들이 꽤 있는 것 같다”며 “누군가의 주장과 반박은 기사를 구성하는 너무나도 단순한 요소 같은데 점점 하나가 생략되는 느낌이다. 독자들은 속도보다 총체적 진실이 버무려진 기사를 읽을 만하다고 여기는데 기자들은 모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사고 현장에서 사연을 강조하는 문화나 현장에 노련한 기자가 보이지 않는 점도 여전했다. A기자는 “4년이 지났는데 유의미하게 바뀐 것이 없다. 어떤 사건이 터지면 현장에 가는 건 항상 낮은 연차고, 지면 계획을 짤 만큼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책상에 앉아 있다”며 “현장에선 아이템이 올라가고 데스크에선 수직적 지시가 내려가는 구조다. 특히 언론사는 폐쇄적인 조직이라 수평적 토론이 원활하게 이뤄지기도 힘들고 어떤 사안에서 교훈을 찾으려는 내부 움직임을 발견하기 힘들다”고 했다. D기자도 “세월호 같은 경우엔 한 언론사만 잘못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잘못했다는 생각이 오히려 내부 시스템을 개선하는 데 방해가 됐다”고 말했다.


4년 전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딱지가 붙은 ‘기레기’는 그래서 아직은 떼 내기 힘든 이름이다. 최근엔 아예 “기레기가 아니라 ‘기발놈(기자+X발놈)’”이라는 명칭까지 새로 생겼다. D기자는 “방송의 영향력과 신뢰도가 세월호 참사 이후 떨어졌다는 생각에 내부에서도 시스템을 개선하려 노력하고 있지만 시청자나 국민이 체감할 수 있을 정도로 뭔가 바뀌지 않았다”며 “아직까지 기레기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해 4월6일 취재진들이 안개속에서 인양된 세월호를 바라보고 있다.(뉴시스)

▲지난해 4월6일 취재진들이 안개속에서 인양된 세월호를 바라보고 있다.(뉴시스)


변하려는 노력은 있었다


그렇다면 내일 당장 세월호 같은 참사가 발생한다면 어떨까? 4명의 기자는 적어도 4년 전과 동일한 수준의 보도 참사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C기자는 얼마 전 해상에서 배가 침몰한 사고를 떠올리며 “전원구조라고 기사가 나왔지만 과연 맞는지 의심하게 되더라. 한 번 더 사실관계를 파악하는 효과는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다만 “모든 사고에서 그와 같은 엄밀한 팩트체크를 하지는 않을 것 같다”며 “어디까지나 비슷한 사고가 있을 때만 발현될 것”이라고 말했다.


B기자는 다들 4년 전보다는 취재윤리를 더욱 고민할 것이라고 했다. B기자는 “당시에는 기자들이 자신을 국민의 알 권리를 대변하는 존재라고 생각했고 때문에 윤리를 무시하고 막무가내로 취재하는 경향이 있었다”며 “이후엔 기자가 물어볼 권리가 있듯 상대방도 말을 안 할 권리가 있다는 걸 다들 깨달은 것 같다. 최소한 생명이 달린 보도 만큼은 피해자에게 신경 쓰고 존중하는 문화가 업계에 자리 잡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4년 동안 많은 것이 변하지 않았지만 그 와중에 변하려는 노력이 있었다는 걸 우리가 스스로 알아야 한다”며 “무엇을 어떻게 더 변화시킬 것인지 논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B기자는 그 답을 독자에서 찾았다. 그는 “언론이 존재하는 목적 자체가 독자고, 독자가 언론을 견제하고 항상 관심 있게 지켜본다면 언론 역시 달라질 수밖에 없다. 지금은 언론이 독자보다 광고주의 눈치를 보는 형국”이라며 “독자들이 좋은 기사를 썼다고 생각하는 언론이 살아갈 수 있게끔 돈을 주고 콘텐츠를 구입해야 한다. 그런 응원의 과정 없이 포털 기사가 전부인 양 평가하고 ‘기레기’라고 비판하는 건 현재를 바꿀 수 없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기본을 강조하는 기자도 있었다. D기자는 “세월호 이전에 이미 재난 보도에 대한 준칙들이 있었다. 그런 준칙을 한 번이라도 숙지했다면 보도 참사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선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 다시 세월호 같은 참사가 발생하더라도 기본을 되새기고 취재에 임하는지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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