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전명 '방송장악'…청와대·국정원·내부자들 있었다

MBC·KBS 장악 기획 문건 MB정부 때 국정원이 작성
좌편향 낙인·프로그램 폐지, SBS에 연예인 퇴출 압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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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 당시 국가정보원이 MBC와 KBS 등 공영방송 기자들을 사찰하고 정권에 비판적인 언론인과 프로그램을 퇴출시키는 등 ‘블랙리스트’ 문건을 작성해 청와대에 보고한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국정원의 공작이 문건 작성에 그치지 않고 문건 그대로 MBC와 KBS에서 실행된 것으로 확인됐다.


18일 국정원 개혁발전위원회가 밝힌 보도자료에서 ‘MBC 정상화 전략 및 추진방안’(2010년 3월 작성)을 보면 이명박 정부의 MBC 장악 시도를 국정원이 총괄 기획했다는 점이 확인됐다. 지난 2010년 김재철 사장 취임을 계기로 ▶좌편향 인물 퇴출로 악순환 고리 차단 ▶편파방송 척결을 위한 근원적 해결책 강구 ▶MBC 정체성 확립논의로 파행방송 행태 경고 등을 진행하겠다는 계획이다.


▲지난 18일 국정원 개혁발전위원회가 공개한 ‘MBC 정상화 전략 및 추진방안’과 ‘KBS 조직개편 이후 인적 쇄신 추진방안’은 지난 2010년 이명박 정부 당시 국정원이 작성한 문건으로, 공영언론을 장악하기 위한 로드맵이 담겨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사진=뉴시스, 연합뉴스)

당시 국정원은 세부 추진방안으로 ‘간부진의 인적쇄신과 편파프로 퇴출’을 꼽았다. 지방사 사장들을 일괄 사퇴시켜 신임사장의 친정체제를 확립해야 한다는 내용도 기술됐다. 또 국장급과 부장급 간부들에 대한 인적쇄신도 주문했다. 문건에는 PD수첩과 MBC스페셜, 후플러스, 시사매거진 2580 제작진 교체 등 구체적인 안이 담겼고, 손00 김00 성00 등 진행자에 대해 ‘반드시 교체하라’는 지시도 명시됐다. 국정원은 또 MBC 노조의 단체협약을 개정하게 하는 등 구체적인 노조 압박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파업, 업무방해 행위는 엄중 징계는 물론 적극적인 사법처리로 영구 퇴출을 추진하라는 점도 강조됐다.


실제로 MBC에서는 김 사장이 취임한 뒤 보도국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물갈이’가 이뤄졌다. 국장급 실무 간부진 교체뿐만 아니라 기자, PD, 아나운서 등 평사원도 화살을 비껴가긴 어려웠다. 특히 사측은 지난 2012년 공정방송을 요구하며 낙하산 사장의 퇴진을 요구한 파업 가담자들에 대해 징계의 칼날을 휘둘렀다. 당시 해고된 6명의 언론인(강지웅 박성제 박성호 이용마 정영하 최승호)은 아직까지 돌아오지 못하고 있고, 이후 5년간 200여명의 언론인들이 비제작부서로 쫓겨나 있는 상황이다.


김재철 전 사장은 취임 직후 인적 쇄신의 명분으로 MBC 모든 관계사(계열사·자회사) 사장들에게 사표를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지역 MBC 및 관계사 경영진 7명 중 6명이 무더기로 교체됐다. 프로그램 진행자도 줄줄이 쫓겨났다. 지난 2009년 9월 ‘100분 토론’의 진행자였던 손석희 앵커가 갑작스럽게 프로그램에서 하차하고, 2013년에는 ‘시선집중’에서도 물러나며 외압이라는 논란이 일었는데, 그 배경이 문건을 통해 확인된 셈이다.


KBS와 SBS도 예외는 아니었다. 2010년 5월 국정원이 작성한 ‘KBS 조직개편 이후 인적 쇄신 추진방안’을 보면 김인규 사장이 취임한 이후 ▶좌편향 간부 퇴출 ▶무능·무소신 간부 보직 변경 ▶비리 연루 간부 기강 문란행위 엄단 등의 지시가 내려온 것으로 확인됐다. 19일자 한겨레의 보도에 따르면 당시 국정원은 SBS쪽에 배우 김민선씨 등 블랙리스트 명단에 든 연예인의 활동 배제를 요청하기도 했다. 김씨는 지난 2008년 5월 자신의 미니홈피에 “광우병에 감염된 쇠고기를 먹느니 청산가리를 먹는 게 낫겠다”는 글을 올린 뒤 이명박 정권의 표적이 된 것으로 보인다.


프로그램 출연자에 대한 배제는 공영방송사에서 더욱 노골적으로 이뤄졌다. 당시 국정원이 작성한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 명단에 82명의 문화예술인이 이름을 올렸다. 방송인 김제동씨는 지난 13일 서울 상암 MBC사옥 로비에서 열린 MBC총파업 10일차 집회에 참석해 “국정원 직원이 찾아와 ‘VIP(이명박)가 당신을 걱정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 1주기 추도식 사회를 보지 말라’고 했다”고 폭로했다. 당시 김씨는 사회를 강행했고 결국 그가 진행하던 MBC 프로그램 ‘환상의 짝꿍’은 폐지됐다. 또 김씨의 소속사 다음기획은 국세청의 세무조사를 두 차례나 받게 됐다. 가수 윤도현과 방송인 김미화, 배우 문성근씨 등 수십여 명의 연예인들은 비슷한 방식으로 공영언론사에서 자취를 감춰야 했다.


MBC의 한 기자는 “블랙리스트 존재 여부는 이번에 드러나기 훨씬 이전부터 짐작은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일일이 사람의 성향을 파악해 지속적으로 배제할 순 없었을 것”이라며 “MB 블랙리스트는 박근혜 정권의 문화계 블랙리스트보다 더 심각한 사안이다. 검찰의 철저한 수사가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국민일보의 한 기자는 이번 사태에 대해 “언론인들은 파수꾼처럼 시대를 지켜야했는데 주지육림에 빠져서 허우적대다 그 틈을 노린 이명박 정권이 파고들어 장악된 것”이라며 “관련자들은 엄벌 조치돼야 하고 언론인들도 각성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이런 것 쯤이야’ 정도로 넘기다 보니 이런 상황에 이르렀다. 언론사 지배구조와 같은 취약한 구조도 함께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국언론노조는 지난 15일 서울 내곡동 국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블랙리스트 원문 공개’를 촉구했다. 이들은 “몇 명에게 죄를 묻기엔 정권이, 국정원이 국민의 알권리를 너무 많이 침해했다. 더 이상 국민의 알권리가 정권 유지를 위해 무참히 짓밟혀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검찰은 문건의 상당수 내용이 언론사 내부의 간부나 기자 퇴출로 현실화된 만큼 당시 누구 주도로 어떤 과정을 거쳐 실행됐는지 등을 집중적으로 조사할 계획이다.

이진우 기자 jw85@journalist.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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