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의 터널에서 여인을 마주치다

[스페셜리스트 | 문학·출판] 어수웅 조선일보 문화부 차장

▲어수웅 조선일보 문화부 차장

같은 동네에 오래 살다보니 이런 일도 있다.
10년이 넘은 일이다. 토요일 밤, 혼술이 아니라 혼자 영화를 보러갔다. 지금은 제목도 기억이 나지 않는 영화. 하지만 뭔가 격정을 이끌어낸 작품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집까지 걸어가겠다는 비이성적 판단을 내렸으니까. 사실 그리 먼 길도 아니다. 걸어서 대략 40~50분. 문제는 중간에 터널이 있다는 점이었다. 연세대에서 독립문으로 넘어가려면 금화터널을 통과해야 한다. 예상외로 짧지 않다. 555m. 성인 걸음으로 7~8분 거리다.


자정 넘은 시각, 터널로 들어섰다. 버스와 승용차가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고, 그 속도가 날카로운 소음이 되어 밀폐된 터널을 난반사한다. 다행인 것은 차도와 인도가 투명 플라스틱으로 격리되어 있다는 점. 물론 인도의 폭이 좁다. 걸어오다 마주치면 어깨를 부딪혀야 하는 넓이랄까.


한 100m쯤 걷다 보니 영화가 원망스러워졌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그 때였다. 터널 반대편에서 실루엣이 나타난 것은. 오그라든 심장을 달래며 자세히 보니 20대 여성의 곡선이었다. 심장의 원상복귀와 함께 역지사지(易地思之)가 시작됐다. 저 여자는 얼마나 무서울까.


교행하려면 어깨를 부딪힐만큼 좁은 인도였다는 전언(前言)을 기억하시는지. 나는 격리대 쪽으로 바짝 붙어섰고, 그녀는 통과했다. 내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또 다른 발자국 소리가 등장했다. 이번에는 곡선이 아니라 각진 실루엣. 빠른 속도로 남성이 걸어온다. 순식간에 나를 제쳤고, 그녀와의 거리는 점점 짧아졌다. 다시 심장이 수축하기 시작했다. 심야의 터널, 혼자 걸어가는 여성, 그 뒤를 쫓는 남성. 다른 장르를 생각할 수 없지 않은가.


하지만 현실은 영화가 아니었다. 궁금해하실 독자 제현을 위해 결론부터. 남녀의 거리는 0이 되었고, 묵직한 목소리가 메아리졌다. “미안, 미안~ 미안~, 내가 잘못, 잘못~, 잘못~.” 하나가 된 실루엣은 터널 반대편으로 빠져나갔고, 호러인 줄 알았던 장르는 로맨틱 코미디가 됐다.


지난 토요일, 10년의 간극을 두고 그 터널을 다시 통과했다.
이번에도 청춘남녀 때문이었다. 연세대 알렌관에서 있었던 후배의 야외 결혼식. 대학 1학년 때 만난 첫사랑이 11년 만에 결실을 맺은 천연기념물 해피엔딩이라고 했다. 주례없이 열린 그 결혼에서 신랑은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겠다”고 큰 소리로 외쳤고, 신부 아버지는 이런 요지의 농담 겸 덕담을 했다. “신랑 ○○○은 미남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 딸 ○○이가 미남이라고 하니,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야 할 것 같기도 하고요.”


이 유쾌한 결혼 때문이었을까. 다시 터널을 통과해보고 싶어진 것은.
연세대 동문을 빠져나오니 봉원사 로터리 앞에 ‘따릉이’ 거치대가 있었다. 지난 번 기자협회보에 썼던 그 서울시 공공자전거다. 한 대를 골라 달리기 시작했다. 10년 전과 달리 중간중간에 ‘긴급전화기’가 보였다. 위급 상황에 사용하라는 것일까. 하지만 그 때와 달리 이번에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555m의 터널을 빠져나오자 빛이 쏟아졌다. 독립문의 벚꽃이 소리없는 폭포가 되어 휘날리고, 2시의 태양이 격렬한 찰나를 뿜어내고 있다.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도는 것 같지만, 우리는 그래도 한 발자국씩 더 밝은 곳을 향해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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