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화로 잊었던 나를 찾다

'긴가민가' 연재 안충기 중앙일보 섹센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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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JTBC 뉴스룸 스튜디오가 있다. ‘ㅅ’ 모양의 앵커석과 손석희·안나경 앵커로 추정되는 두 사람, 그 뒤를 둘러싼 대형 스크린. 앵커를 향하는 카메라와 지미집, 촬영감독들, 천장에 달린 조명이나 직사각형 바닥 무늬까지 모두 세밀하게 묘사돼 있다.


중앙일보 섹션에디터인 안충기 기자가 검정펜으로 그려낸 <손석희 앵커가 2시간씩 노는 방>이다. 기자이자 펜화가인 그는 자신의 작품에 글을 더한 <안충기의 긴가민가>를 중앙일보 온라인에 연재 중이다.


지난달 시작한 <긴가민가>의 인기는 상당하다. 조회수가 수십만에 달해 포털 ‘많이 본 기사’ 상위권에 오르기도 했다. 그의 펜화는 현장 취재 원칙 덕에 섬세한 묘사가 돋보인다. 재미난 구어체 문장도 인기 비결이다. 글에선 충청도 사투리 “~유”는 말할 것도 없고, 맞춤법을 빗나간 말들이 쉴 새 없이 튀어나온다. 손석희 앵커는 ‘석희 형아’로, 다른 이들도 언냐, 형아, 아재, 할매, 할배로 표현한다.


▲동그란 안경에 헌팅캡을 쓴 그는 인터뷰에 앞서 사진부터 찍자며 펜을 얼굴 중앙에 대고 포즈를 취했다. 로트링사의 ‘티키 그래픽 0.1’. <긴가민가> 속 펜화를 그를 때 쓰는 펜이다.

지난 17일 저녁 서울 중구 중앙일보 사옥에서 만난 안 기자는 “길바닥 언어 또는 충청도 아재체로 글을 쓴다”고 했다. 고향 사투리가 툭툭 묻어나는 말투가 그의 글에 고스란히 녹아든 것 같았다.


<긴가민가>의 출발지는 그의 페이스북이었다. 직접 그린 펜화에 글을 덧붙여 올렸는데, 친구들의 반응이 좋았다. 곧 자사 홈페이지에도 진출했다. “출근길 지하철 풍경처럼 일상을 그린 거라 글도 제 말투였어요. 온라인이라서 문체 그대로 연재할 수 있었죠 뭐. 그래도 회사 이름이랑 바이라인을 달고 나니 사적·공적 영역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걷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하하.”


펜화를 처음 그린 건 40대 중반, 삶이 심심해질 무렵이었다. 아이의 스케치북을 식탁에 펴고 펜으로 쓱쓱 선을 그었다. “9년 전 평범한 주말이었어요. 그냥 그리고 싶더라고요. 몇 시간 낑낑댔는데 생각보다 괜찮던데요? 다시 나를 찾은 기분이었죠.” 그는 고1 때까지 미술을 전공하다 그만뒀다. ‘미술 하면 굶어 죽는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기자로 밥벌이하던 그는 아이의 스케치북과 펜 한 자루에서 까맣게 잊고 있던 미술과 조우한 것이다.


그 길로 그림에 빠져든 안 기자는 지금껏 매일 펜을 들고 있다. 컴퓨터 모니터엔 ‘필일필(必日筆) 일일일작(一日一作)’을 써 붙였다. 일에 치이고 숙취에 시달려도 하루 한 획이라도 긋자는 약속이다. 단 하루 맘 놓고 쉴 수 있는 토요일도 마찬가지다. 새벽에 주말농장에서 3~4시간 밭일을 하고 와선 온종일 그림 삼매경이다.


이미 6차례 협회전에 참여한 그는 오는 4월 전시회를 앞뒀다. 잉크펜이 아닌 먹물을 찍은 철펜으로 수개월 간 그린 작품을 선보인다고 했다. 1시간 남짓한 저녁 식사 겸 인터뷰 내내 그림 이야기를 하는 안 기자는 행복해 보였다. “헛소리하다 늦어졌다”며 후다닥 회사로 돌아가는 그는 내일 또 새벽부터 일어나 기어코 펜을 잡고, 그의 표현처럼 ‘꾸역꾸역’ 그림을 그릴 테다.

김달아 기자 bliss@journalist.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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