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C '탄핵' 방송사고가 시사하는 것

[글로벌 리포트 | 영국]김지현 골드스미스 런던대 문화연구 박사과정

▲김지현 골드스미스 런던대 문화연구 박사과정

지난 9일 BBC 방송은 로버트 켈리 부산대 교수를 초대해 박근혜 전 한국 대통령의 탄핵이 남북관계에 미칠 영향에 대한 전문가 의견을 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진지한 분위기는 켈리 교수의 자녀 두 명이 방문을 열고 등장하자 깨졌다. 당황한 켈리 교수가 말문을 잇지 못하는 동안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어머니가 뛰어들어왔다. 그리고 아이들을 날렵하게 방문 밖으로 끌어당겨 그 난처한 상황을 수습했다. 일 분도 채 되지 않은 사고였다.


하지만 그 여파는 일주일이 넘도록 확산되고 있다. 탄핵이라는 진지한 주제와 어울리지 않게 해맑기만 한 아이들의 표정, 그 상황을 해결하려는 어른들의 필사적인 모습이 대비되어 웃음을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이 ‘재미난’ 방송사고는 지난 19일 기준, BBC 온라인 채널들을 통해서만 1억3000만회 이상 조회됐다. 영국에서는 한국 대통령의 탄핵 소식만큼이나 화제를 모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이 영상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재매개되는 과정에서 마냥 웃을 수 없는 어두운 주제의 이야기들이 뒤엉켜져 사건 당사자들과 BBC를 당황케 했다.


소셜미디어 이용자들이 동영상 속에서 어린 아이들을 끌어낸 여성을 ‘유모’가 틀림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일부 매체들 역시 사실 확인 없이 영상 속 여성을 ‘유모’로 묘사하면서 혼란을 가중시켰다. 일례로 ‘타임’의 온라인 서비스는 “광분한 유모가 터질듯 뛰어들어와 아이들을 문밖으로 데려갔다”고 영상을 해설했다. 하지만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한국인 시청자들은 비디오 클립을 보자마자 그녀가 어머니라는 점을 눈치챘을 것이라며 아이가 동영상 속에서 “왜 그래? 엄마, 왜?”라고 말하고 있다며 이러한 오보의 문제를 지적했다.


사건의 파장이 커지자 방송사고의 진원지였던 BBC는 같은 달 11일, 유명 작가인 마리아 청이 쓴 ‘왜 사람들은 BBC의 입소문 난 비디오에 등장한 아시아 여성을 유모라고 추측했을까?’라는 칼럼을 홈페이지에 소개하며 그 논란을 끝내고자 했다.


청은 사람들이 동영상 속 엄마를 유모로 착각한 데에는 아시아 여성에 의해 수행되는 (사회적) 역할에 대한 인종차별적 고정관념이 작용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Bad Feminist’의 저자 록산느 게이 역시 트위터를 통해 그와 비슷한 주장을 펼쳤다. 게이는 ‘유모’가 아니라고 밝혀진 이후에도 여전히 비디오에 등장한 여성이 남성보다 어려 보이고 아이들과 다른 인종으로 보인다는 이유로 그러한 추측을 정당화하는 사람들이 있다며, “그것은 인종차별주의자에게나 정당할 가정”이라고 반박했다.


켈리 교수의 가족이 BBC와의 14일 후속 인터뷰를 통해 영상 속 여성은 ‘어머니’가 맞다고 밝히면서 그 논란 자체는 일단락되었다. 이제 관심은 이번 일이 미디어 생산자들에게 시사하는 바에 모아지고 있다. 배우 베라 척은 이번 방송사고에서 아시아 여성에 대한 성차별, 인종차별 논란이 불거진 데에는 그동안 영국 미디어를 통해 아시아 여성이 제한된 역할로만 묘사된 것이 한 몫 했다고 주장해 관심을 끌었다. 실제 방송통신규제기관인 오프콤의 수용자연구에도 BBC는 ‘중간계급의 백인 계급’을 주로 재현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에 대해 소수 인종과 노령의 여성 수용자들이 불만을 갖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여기서 상기해볼만한 논의로, 아서 아사 버거는 우리가 사회적 역할에 대해 얻는 지식은 미디어와 같은 자원들을 통해 얻어진다고 지적한다. 미디어 소비를 사회화 과정으로 이해할 때, 소수인종과 특정 젠더에 대한 제한적 묘사가 장기적으로 수용자들에게 그에 대한 고정관념을 내면화시킬 위험이 지적된다.


혹자는 정보화, 디지털화로 소수자, 약자의 목소리가 전달된 기회가 확장되지 않았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 논란이 보여주듯 우리 속에 내면화된 인종차별주의는 이성적인 판단보다 더 빠르게 뛰쳐나오기도 한다. 제도권 언론들의 오보와 소셜미디어 이용자들의 재잘대는 수다를 통해 그 편견이 확대·재생산되는 과정에서 무엇이 진실인지를 판가름하기란 ‘가짜 뉴스’를 찾아내는 일만큼이나 어려워진다. 우리에게 이제 필요한 것은 미디어 생산자들의 성숙함 뿐 아니라 미디어의 고정된 성역할, 인종 재현에 맞서는 기술 투쟁, 이를 위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 모두일지 모른다.


김지현 골드스미스 런던대 문화연구 박사과정의 전체기사 보기

배너

많이 읽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