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까지 고쳐쓰는 중국의 전승공정

[글로벌 리포트 | 중국]예영준 중앙일보 베이징 총국장

▲예영준 중앙일보 베이징 총국장

“‘8년 항전’ 대신 ‘14년 항전’의 개념을 확실히 하고 교과서도 개정할 것.”


중국 교육부의 2017년 1호 문건, 다시 말해 새해 들어 처음으로 일선의 각급 교육 당국에 내려보낸 문건의 핵심 내용이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이렇다. 중국과 일본 제국주의가 정면으로 맞붙은 중일전쟁은 1937년 노구교(盧構橋·루거우차오) 사건을 계기로 발발해 1945년 일제 패망때까지 계속됐다는 게 지금까지의 역사해석이었다. 1937년 7월7일 베이징 외곽의 노구교 인근까지 진입해온 일본군과 중국군 사이에 교전이 발생한 것을 시작으로 중국 대륙의 전 인민이 대일 항전에 나섰다는 것이다. 중국 뿐 아니라 전세계 학계에서 통용되온 정설이었고 한국의 중·고생들도 그렇게 배웠다. 당연한 결과로 중국이 일본과 맞서 싸운 기간은 8년이 된다.


그런데 이제부터 중일전쟁의 기점을 1931년으로 앞당기겠다는 것이 중국 당국의 새로운 공식 해석이다. 1931년 9월18일 선양(瀋陽) 류탸오후(柳條湖) 부근에서 일본이 남만주 철도를 폭발하는 자작극을 펼치고 이를 핑계로 만주 점령을 시작한 9·18 만주사변 이래 중일전쟁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중국의 항일전쟁 기간은 14년으로 늘어나게 된다.


그렇다면 왜 지금까지는 1931~37년의 6년을 항일전쟁 기간에 포함시키지 않았던 것일까. 그건 ‘전쟁’이란 용어를 사용할 만큼의 전면적인 대일 항전이 그 기간동안 일어나지 않았다고 봤기 때문이다. 9·18 사변 당시 장제스(蔣介石)는 동북 지방을 장악하고 있던 군벌 장쉐량(張學良)에게 “저항하지 말라”는 전문을 보냈다. 실제로 동북군은 제대로 저항해 보지도 않고 만주를 일본에 내주고 말았다.


하지만 근래 들어 중국은 그 사이 일어났던 만주에서의 저항을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동북항일연군의 활동이다. 한때 대원수 50만명을 헤아린 이 부대는 만주 일대에서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김일성이 이 부대에서 간부로 활동했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전쟁 기간만 늘린 게 아니라 성격규정도 달리해 항일 전쟁에서 반(反)파시스트 전쟁으로 개념을 확장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중국 공산당이 어느 국가, 어느 정치집단 못지않게 큰 역할을 했다고 강조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게 ‘동방(東方) 주전장’ 개념의 도입이다. 중국은 서방 주전장(유럽대륙)과 함께 2차 대전의 양대 주전장이었으며 이 전장에서 중국 인민이 공산당의 지도 아래 파시스트 세력을 격퇴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방점은 공산당에 찍힌다. 앞서 말한 동북항일연군도 공식적으로는 공산당 휘하 부대가 아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공산당의 지도하에 있었다고 강조하는 게 그 실례다. 중국의 항일전쟁은 장제스의 국민당이 주역이었고 공산당은 후방에서 유격전 위주의 적후(敵後)전쟁을 수행하는 데 그쳤다는 종전 역사학계의 상식에 어긋나는 해석이기도 하다.


중국은 2015년 베이징의 노구교 인근을 비롯, 중국 각지에 있는 항일 전쟁 기념관의 2015년 전시 내용물을 전면 교체했다. 그 속에 “중국은 14년간 반파시스트 전쟁을 치렀다. 미국은 3년9개월, 소련은 4년2개월간 싸웠다”는 설명이 새로이 등장한 걸 보면 일련의 역사 재평가 작업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시진핑(習近平) 체제 출범이후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중국의 꿈’, 다시 말해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과 맞닿아 있는, 요컨대 아편전쟁 이후 잠깐동안의 굴욕을 씻어내고 부흥을 이뤄낸(혹은 곧 이뤄낼) 중국이 파시즘과 싸운 2차대전의 승전에서도 (미국 등 서방국가에 밀리지 않는) 가장 위대한 역할을 했으며, 그 주역은 중국 공산당이었음을 내세우려는 것이다. ‘전승공정’이라 일컬어도 좋을 만큼 정치적 색채가 강한 역사 재평가 작업이다.


필자는 2015년 당시 ‘전승공정이 시작됐다’란 제목의 칼럼을 쓴 적이 있는데 이번 교육부 1호 공문을 보고 당시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지금와서 돌이켜 보면 전승공정의 클라이막스는 ‘반파시트 전승 70주년’이란 이름하에 거행된 2015년 9월의 천안문 열병식이었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천안문 망루 위에 서기까지의 결정 과정에 이런 중국의 속셈에 대한 고려가 얼마나 있었는지 사뭇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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