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고음 못낸 삼성합병, 430억 뇌물로 이어졌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당시
'애국 마케팅'에 치우친 보도
국민연금 찬성 결정 문제 외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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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 그때 더 큰 경고음을 울려야 했다.”
박용채 경향신문 논설위원은 지난해 10월17일 칼럼에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승계 작업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는 작업이었다”며 이렇게 썼다. 그는 “소액주주연대를 비롯해 국내외 주요 의결권 자문기구들이 국민연금공단 측에 국민이익에 반한다며 반대를 권고했지만 국민연금은 삼성 편에 섰다”며 “그럼에도 정부나 정치권, 언론 어디서도 문제 삼기는커녕 삼성 보호막을 자처했다”고 했다.


울리지 못한 경고음은 지난해부터 커지기 시작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불똥이 국민연금에까지 튀면서 다시금 2015년 삼성 합병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지난 16일 이재용 부회장에게 사전구속영장이 청구되면서 당시 합병을 둘러싼 수많은 쟁점이 도마 위에 올랐다. 특검에 따르면 이 부회장은 자신의 경영권 승계 문제가 걸린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 지원을 받는 대가로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씨에게 430억원의 뇌물을 준 혐의를 받고 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불똥이 국민연금에까지 튀면서 다시금 2015년 삼성 합병이 주목받고 있다. 사진은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안 가결 다음날 조선일보(왼쪽부터 시계방향), 동아일보, 한겨레, 경향신문 기사 캡처.

그렇다면 경고음은 왜 1년이 지난 후에야 울리기 시작한 걸까. 당시는 알기 힘들었던 청와대의 외압이나 국민연금 내부 투자위원회 회의록 등이 이제야 공개됐기 때문일까. 하지만 대가성은 별개로 치더라도 당시 합병 과정엔 많은 논란들이 있었고, 수면 위로 드러난 의혹도 상당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논란과 의혹은 소수의 언론사에서만 언급된 채 묻혀버렸다. 본보는 2015년 삼성 합병 전후 4개월과 최근 4개월간의 언론 보도를 분석해 당시 언론이 무엇을 놓쳤는지, 왜 놓칠 수밖에 없었는지 살펴봤다.


2015년 5월26일, 삼성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결의했다. 삼성은 합병의 당위성에 대해 바이오사업 역량이 더욱 강화되는 등 시너지 효과가 기대된다고 설명했지만 당시 이재용 부회장의 승계 작업이라는 걸 인지하지 못한 기자는 없었다. 종합일간지 A 차장은 “경영권 승계용이라든지, 이재용 일가에 유리한 합병이라는 걸 암묵적으로 동의하지 않았던 기자는 거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합병의 핵심이 사업상 시너지 효과가 아니라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권 확보라는 걸 인지하고 있는 정황은 여러 사설과 칼럼에서 드러난다. ‘삼성은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을 출범시키고 이재용 부회장으로의 경영권 승계 작업에 가속도를 낼 수 있게 됐다.’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이 무산된다면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에서 이재용 부회장으로 이어지는 승계 작업이 차질을 빚어 지배구조 전체가 흔들리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그러나 삼성의 지배구조와 경영권 승계 작업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언론 보도는 경향, 서울, 한겨레를 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국민연금의 합병 찬성 이후 사설로 “후진적 지배구조를 탈피하라”는 지적도 소수에 그쳤다. 대부분의 언론에게 합병은 “안정적인 기업 경영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이었을 뿐, 지배구조에 대한 본질적 고민은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었다.


특히 미국계 사모펀드 엘리엇과의 양자구도는 모든 의혹을 차단하는 강력한 프레임이었다. 단기차익을 노리는 헤지펀드 때문에 삼성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애국주의 프레임은 떳떳하게 삼성을 보호할 수 있는 근거가 됐다. 외려 국민, 동아, 세계 등 다수 언론들은 해외 ‘먹튀’ 자본에 맞서 대기업을 방어할 장치가 필요하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종합일간지 B 부장은 “먹튀는 비판하면서 왜 먹튀 빌미를 제공한 삼성은 반성하지 않는지 답답했다”며 “하지만 나 역시 그런 기사를 쓰지 못했다. 그때는 애국 마케팅이 성공했고 국익을 위해서라도 합병에 찬성해야 한다는 여론이 대세였다”고 말했다.


애국주의 프레임은 합리적 의혹도 손쉽게 소멸시켰다. SK 합병 때와 달리 내부 회의를 통해 삼성 합병이 ‘밀실 결정’ 됐어도, 이후 국정감사에서 홍완선 당시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 등이 이재용 부회장과 비밀리에 만난 것이 밝혀졌어도 대부분의 언론은 이 내용을 다루지 않았다.


종합일간지 C 기자는 “지금이랑 사실관계가 다른 게 별로 없다. 당시 국정감사에선 국민연금이 자체 분석한 적정 합병비율이 제일모직 1주당 삼성물산 0.46주라는 사실이 이미 밝혀졌었고, 따라서 국민연금이 수천억원의 손실을 볼 것이란 점을 알고도 삼성 합병을 찬성한 정황이 다 드러났었다”며 “그때도 소수의 언론사를 빼고는 그 내용을 다루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언론은 왜 의혹에 침묵한 것일까. 일부 기자들은 삼성의 영향력을 무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 종합일간지 D 기자는 “삼성의 영향력이야 금융 투자업계도 그렇지만 언론계에도 상당하다는 건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 아닌가. 때문에 전체적인 언론 지형에서 삼성 쪽에 우호적인 기사가 많이 쏟아져 나왔다”면서 “우리 언론사도 그랬다. 삼성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어려우니까 기사를 쓰더라도 키울 수 있는 걸 작게 취급한다든지 하는 게 있었다”고 말했다.


종합일간지 E 기자도 “2015년 바른사회시민회의가 여는 토론회를 간 적이 있다. 당시 토론회 내용은 삼성에 유리한 것이었다”며 “그런데 취재 도중 옆자리 경제지 기자들에게 삼성 임원이 계속 전화를 걸어 ‘잘 좀 부탁드린다’고 청탁을 하더라. 그렇지 않아도 친 삼성적인 기사를 쓰는 곳에 청탁성 전화를 거는 것을 보며 당시 삼성이 합병에 엄청나게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알았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합병 비율 자체가 불공정하다는 인식은 일부 기자들 사이에 공유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대놓고 비판 기사를 쓰느냐 마느냐는 회사 논조에 따라 달라졌다”면서 “회사 사정상 어쩔 수 없이 못 쓴다고 얘기한 기자들이 있었다”고 했다.


기자들은 삼성의 영향력이 아직도 기사에서 드러난다고 말했다. 최근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특검의 구속영장 청구에 일부 언론이 경제 상황을 고려해 신중히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방송사 F 보도국장은 “이전엔 오너 리스크 때문에 우리 경제가 흔들렸지만 지금은 다르다. 삼성 주가도 최고치”라면서 “오히려 오너 문제가 빨리 처리되는 것이 시장의 불안감을 줄어들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동훈 전국언론노조 민주언론실천위원장은 “2015년에 제대로 감시하고 비판했으면 이런 상황까진 오지 않았을 것”이라면서 “지금부터라도 언론이 성역 없이 제대로 비판하고 감시해야 한다”고 했다.

강아영 기자 sbsm@journalist.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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