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무형유산 제주잠(해)녀-제주해녀 미래성장 동력으로

제315회 이달의 기자상 지역기획보도 신문·통신부문 / 제민일보 고미 기자

  • 페이스북
  • 트위치

▲제민일보 고미 기자

2005년 봄 한 선배가 불쑥 물었다. “너 ‘해녀’해 볼래?” “내가요?” 고민이 됐다. “잘 모르는데요.” “그러니까 더 해야지.” 그렇게 시작한 작업은 새해가 11번이나 바뀌는 동안 이어졌다. 처음 4명으로 시작했던 팀이 뿔뿔이 흩어지며 혼자 남았다가 다시 든든한 후배들로 채워졌다.


제주해녀에 ‘문화’라는 수식어 하나를 더 붙이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해녀들조차 그럴 필요가 없다는 반응이 많았다. 취재 약속을 하고도 물때가 되면 그대로 바다에 나가는 일이 다반사였다. 작업을 마치고 돌아와 수확물을 정리하고 집에 갈 채비를 할 때까지 2~3시간 기다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10년 넘는 동안 ‘일’은 수없이 많았다. 하마터면 ‘해양민속박물관’이 될 뻔했던 해녀박물관의 이름을 지켰고, 해녀문화전승보전조례의 탄생을 지켜봤다. 1900년 초반에 시작된 독도 물질이 1970대까지 이어졌다는 역사의 연결이나 광복 이후 근현대사의 굴곡을 거쳐 ‘여성 단일직업’으로 남아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의 의미도 확인시켰다. 그 과정에서 지난해 제주해녀어업이 국가중요어업유산 제1호로 지정됐고 지난달 30일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대표목록으로 등재됐다.


11년 동안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언제까지 할 거냐’였다. 혹시 그 언제가 오지 않을까 조바심한 적도 있지만 적어도 ‘사라져 버릴지도 모를’ 것에 대한 관심을 유도했고, 문화유산적 가치를 격 없이 논할 수 있는 자리가 깔렸으니 이제는 “좀 알겠네요”라고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유네스코 등재까지’라는 첫 약속만 지켰다. 고백건대 ‘직접 물질을 하겠다’는 장담은 접은 지 오래다. 여전히 ‘해녀’는 아니다. 대신 공동체성과 여성성의 ‘해녀문화’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솔직히 이번엔 ‘언제까지’라는 약속은 하지 않을 생각이다. 더 길게 ‘물숨’을 참아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제민일보 고미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배너

많이 읽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