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겨울에 읽을 만한 소설 두 권

[스페셜리스트 | 문학·출판] 어수웅 조선일보 문화부 차장

▲어수웅 조선일보 문화부 차장

시침 뚝 떼고, 겨울에 읽을 만한 소설 이야기를 해 보자. 일주일에 소설 한 편 읽을 시간마저 없다면 그게 사는 건가. 나라는 나라대로 바꾸고, 나는 또 나대로 살찌워야 할테니.


우선 읽고 나면 따뜻해지는 단편과 읽는 내내 낄낄거리게 되는 장편을 하나씩 추천한다. 성석제의 ‘믜리도 괴리도 없시’(문학동네)와 천명관의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예담)이다.


“개의 몸에 기생하는 진드기가 있다. 한 번 박은 진드기의 머리는 돌아 나올 줄 모른다. 죽어도 안으로 파고들어가 죽는다. 나는 그 광경을 ‘몰두’라 부르려 한다.”


이게 성석제식 ‘몰두’의 정의다. 이번 소설집에 들어있는 단편 ‘몰두’는 만 권 남짓한 책이 있는 외삼촌의 서재에서 시작한다. 새로 집을 고치고 서재를 정리하는데, 열아홉 살 주인공은 외삼촌 조수를 자청한다. 대학 입학 용돈 정도를 욕심내며 벌인 일. 꼬박 일주일이 지나 드디어 마지막 한 권이 남은 순간, 외삼촌이 묻는다.


“내가 지금까지 읽은 책이 억만 권, 옛날에는 십만을 억만이라고 했다. 그 많은 책을 읽고 그 중 십분의 일 정도만 가리고 뽑아 모은 것은 바로 지금 네게 물어본 그런 궁극의 책을 찾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이치를 규명하게 해 주는 책의 결정판, 즉 단 한 권의 책을 ‘이피터미(Epitome)’라고 하지. 너는 이 책들 중에서 진정한 이피터미가 어떤 책인지 알겠느냐?”


같은 질문을 당신에게 던진다면 어떨까. 당신 인생 단 한 권의 책을 꼽을 수 있을까.


장편으로 고개를 돌려 보자.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의 천명관. 겁이 없는걸까, 판단력이 부족한 걸까. 말 한 마디 실수하면 ‘여혐’이라 비난받는 2016년의 대한민국에서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라고 포효하는 ‘만용(蠻勇)’이라니.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 ‘남아일언중천금’ 계열의 의리와 호탕함이 아니라, 읽으면 읽을수록 허술하고 못난 사내들이 허당을 잇따라 짚는다. 성석제의 성스러운 ‘이피터미’와 달리 번지르르한 허풍 뒤에 숨은, 어리석고 추접스런 뒷골목 사내들만 박스 단위로 등장한다.


이 너절한 남자들을 유혹하는 서사의 핵심 엔진은 35억짜리 종마(種馬)와 20억짜리 밀수 다이아몬드. 작가 특유의 ‘촉’이 있었던 걸까. 최순실 딸의 금메달 경주마도 겨우 10억이라는데, 천명관의 종마는 세 배를 훌쩍 넘는다. 어쨌거나. 경마 조작 임무를 띠고 망치로 말 무릎 때리러 갔던 ‘비정규직 조직원’(바야흐로 건달도 청년실업 시대) 울트라가 ‘형님’에게 잘 보이려고 트럭에 아예 종마를 싣고 온 절도 사건, 그리고 송도 주얼리 박람회에 출품된 콩고 다이아몬드 바꿔치기 사건이 얽히면서 말 그대로 비루한 것들의 카니발이 펼쳐진다.


산다는 건 무엇일까. ‘몰두’에는 우리가 ‘서예의 거성’으로 알고 있는 중국 왕희지의 아들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왕희지 다섯 번째 아들 이름은 후대들이 헛갈리게도 왕휘지. 휘영청 빛나는 달을 보며 어느 밤 시를 읊던 왕휘지는 멀리 호수 건너에 사는 친구가 보고 싶어졌다. 배를 띄웠고, 어둠과 추위와 바람을 뚫고 친구 집 문전에 다다른 순간, 갑자기 그냥 집으로 되돌아가자고 했단다. 그 고생을 해 놓고 왜? “내가 친구를 보려고 하는 마음의 흥이 일어 갔다가 그의 집 앞에서 흥이 다하였으니, 굳이 친구를 만날 필요가 있겠는가”


그 마음. 밤새 호수 건너 배를 타고 찾아갔던 몇 시간 동안의 흥(興). 친구가 집에 있건 없건, 친구가 자신을 반기건 그렇지 않건, 그 밤의 흥 만큼은 온전히 나만의 즐거움이라는 것. 이 생이 끝나기 전에 다가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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