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강도 보도지침의 압력은 계속되고 있다"

보도지침 폭로 30주년 기념 세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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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4일 한국방송학회·언론학회·언론정보학회는 보도지침 폭로 30주년을 맞아 숙명여대 백주념기념관에서 한국의 언론 통제와 언론자유의 30년 역사를 짚는 세미나를 열었다.

“보도지침을 폭로한 지 어느덧 30년이 됐지만 이 사건은 아직도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의 일처럼 한국 사회에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30년 전보다 더 언론 상황이 후퇴해 가고 있다는 점에서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1986년 전두환 정권의 언론통제 실상이 담긴 보도지침 자료를 폭로한 김주언 전 한국일보 기자는 보도지침 폭로 30주년을 맞아 한국방송학회·언론학회·언론정보학회가 지난 24일 숙명여대 백주년기념관에서 주최한 세미나에서 30년이 흐른 지금의 언론 상황이 과거보다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고 우려했다. 


김주언 기자는 “최근 김시곤 당시 KBS 보도국장과 이정현 당시 청와대 홍보수석의 통화 녹취록이 공개된 것을 보며 과거로 돌아간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면서 “청와대는 통상적인 업무라고 주장했지만 30년 전 보도지침이 폭로됐을 때도 전두환 정권은 언론사에 협조를 요청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등 같은 논리를 내세웠다. 지금의 기자들이 보도지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남산에 끌려가 고문을 받지는 않지만 일자리를 잃거나 불이익을 받는 등 ‘저강도 보도지침’의 압력은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또 정치권력의 압력은 전두환 정권 이후에도 계속됐다고 전했다. 김 기자는 “보도지침이 30년 만에 살아난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면서 “역대 정부와 언론의 관계를 보면 직접적이지 않았을 뿐 간접적인 통제는 지속적으로 이뤄져 왔다. 그 강도가 약하거나 강하거나의 차이였을 뿐이다”고 덧붙였다.


이날 세미나에서 발제를 맡은 조항제 부산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도 “공영방송이 민주화라는 획기적 계기를 맞고서도 큰 틀이 거의 그대로 유지된 점은 상당한 아이러니”라면서 “과연 보수 정부가 아닌 진보 정부가 들어선다면 지금 제기되는 문제점들이 깨끗하게 해결될 것인가. 진보 정부에서 홍보수석은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 그런 것을 생각해본다면 결국 똑같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토론자로 참여한 정필모 KBS 연구위원도 “30년이 지났지만 언론에 대한 권력의 통제는 점점 더 방법이 세련되고 교묘해졌을 뿐 근본적인 변화는 없다”면서 “당시는 민주화만 되면 언론의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후배들한테 참 열악한 환경을 물려주고 간다는 자괴감이 있다”고 토로했다.


지금의 언론 상황에서는 정치권력보다 자본권력의 통제가 훨씬 더 우려스럽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발제를 맡은 문소영 서울신문 사회2부장은 “정치권력과 싸우는 것은 탄압받는 구도가 명확해 적극적으로 저항할 수 있다”면서 “반면 자본권력과의 싸움은 너무나 지난하고 아무도 관심이 없다. 실제로도 매번 깨지기 때문에 기자들이 자본권력에 대항할 힘이 없고, 경영진 역시도 자본권력에 적극적으로 저항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토론자로 참여한 박홍원 부산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도 “디지털 기술 혁명으로 인해 점점 언론의 수익 모델이 파괴되어 가고 있고 시민사회도 파편화되면서 민주주의의 위기가 오고 있다”며 “그런 차원에서 신자유주의 이후 전 지구적인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은 자본이다. 이제 대부분의 기자들이 소위 홍보성 기사를 써주는 것 자체를 문제라고 인식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이봉현 한겨레 미디어전략부국장 역시 “현실에서는 정치권력보다 자본권력이 더욱 편집국을 통제하고 있다”면서도 “한 번이라도 제대로 자본권력과 싸워봤는지 묻고 싶다”고 반문했다. 이 부국장은 “한겨레는 보도할 건 보도하면서 삼성으로부터 2년 동안 광고를 못 받은 적이 있다. 그 때 보조를 맞춰주는 신문사나 방송사가 한 곳이라도 있었다면 자본권력이 언론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이라도 변화했을 것”이라면서 “이제 자본권력이 편집국에 찾아오는 일은 없다. 광고국을 통해 적절히 통제한다. 과연 우리가 과거 선배들이 정치권력에 대항했던 것만큼 자본권력과 싸우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날 세미나에 참석한 발제자들과 토론자들은 정치·자본권력의 통제에 맞서기 위한 다양한 대안들을 제시하기도 했다.


발제자들과 토론자들은 정치·자본권력의 통제에 맞서기 위한 다양한 대안들을 제시하기도 했다. 먼저 정치권력의 통제에 맞서기 위해서는 지배구조 개선 등 제도적인 측면과 내부역량 강화 등이 꼽혔다. 토론자로 참여한 송현주 한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는 공영방송의 지배구조부터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송 교수는 “정치권력이 방송을 도구화하면 할수록 영향력은 감소하고, 결국 언론계는 더욱 보수 지형으로 기울게 된다”면서 “해결방법은 지배구조 개선”이라고 강조했다.


정필모 연구위원은 “지배구조 개선은 출발선에 불과하다”면서 “시민사회의 확장이란 측면에서 독일식의 방송평의회제도 등을 생각해 봐야 한다. 또 직업윤리 의식 고취 등 내부 역량을 강화해야만 지배구조가 바뀌더라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자본권력의 통제에 맞서기 위한 방안들도 제시됐다. 박홍원 교수는 “자본주의 축적 양식이 바뀌면서 언론인들은 생존과 실존의 문제에서 고민하고 있다”며 “좋은 저널리즘을 실천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송현주 교수는 공적 펀드를, 문소영 부장은 신문의 엘리트지화를, 이봉현 부국장은 언론 기부 세액공제 등을 제안했다. 이봉현 부국장은 “깨끗한 정치를 위해 정치인들에 대한 소액 기부는 세액공제를 해주지 않나. 언론에 대해서도 연 10만원 정도의 소액을 기부하면 세액공제를 해줬으면 좋겠다”면서 “기부하는 사람이 연 10만명만 있으면 좋은 기자를 고용해 훌륭한 언론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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