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지에서 기자생활…기사 쓸 땐 누구보다 치열하게

제2의 고향에서 일하는 기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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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기자는 해당 지역 출신만 한다? 고리타분한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지역사 채용에서 ‘빨리 그만둘 것 같아서’ ‘지역에 애정이 없을 것 같아서’ 등의 이유로 다른 지역 출신을 선호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연결고리 하나 없는 지역 곳곳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기자들이 있다. 제2의 고향에서 기자로 사는 삶에 대해 물었다.



“지역에 도움되는 기사 써야죠”
가여 제주신보 기자(중국 출신)


▲가여 제주신보 기자

‘내가 될 수 있을까?’ 기자 모집 공고를 본 순간 가슴이 쿵쾅거렸다. 한국에서, 그것도 제주에서 기자가 된다니. 상상도 해본 적 없었다. 외국인인 데다 언론과 상관없어 보이는 관광학을 전공한 탓에 망설였다. 그래도 도전하고 싶었다. 용기 내 지원서를 냈던 그는 마침내 최종합격 명단에 올랐다.


중국인인 가여 기자는 지난해 10월 제주신보에 입사했다. 그는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면서도 “아직도 말투에서 중국인 티가 난다”며 “기자로서 공부해야 할 것, 배워야 할 게 많다”고 했다.


“2007년 중국에서 한류 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였어요. 한국여행에서 좋은 인상을 받으신 엄마가 한국유학을 추천하셨죠. 바로 가겠다고 했어요.(웃음) 성격이 활발하니 전공으로 관광학을 택했습니다.”


예상대로 한국과 관광학은 그에게 잘 맞았다. 한국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일찍 중국으로 돌아간 친구들이 많았지만, 그는 여기서 석사과정까지 마쳤다. 대학원 졸업 후 한국에서 살겠다 생각하고 제주도로 향했다. 관광객이 많은 제주에서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여행사, 대형 호텔 등에서 3년여간 근무하다 기자가 됐다. 우연히 본 기자 채용공고가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기자는 열정이 있는 직업이라고 생각했어요. 신기하기도 했고요. 한국인도 기자가 되기 어렵고 취재도 힘들 텐데, 중국인인 저는 자격이 없을 것 같았죠. 하지만 기자라는 일이 궁금했어요. 어떤 사건이나 정보를 가장 먼저 알 수 있다는 게 매력적이었거든요.”


수습생활을 거쳐 미디어팀에서 일하는 가여 기자는 “기자라서 매일 행복하고 감사하다”면서도 “선배들의 기사를 보며 ‘기자가 쉬운 직업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한다. 성실하게 열심히 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어떤 기자가 되고 싶으냐고 물었다. 단번에 “진실한 기자”라는 답이 돌아왔다. “기자는 거짓말하면 안 되잖아요. 제가 살고 있고 사랑하는 제주의 진실한 모습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싶어요. 제주에 애정이 큰 만큼 도민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기사를 써야죠. 제주에 오면 연락하세요. 언제든 제가 소개할게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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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 안보고 기사 씁니다”
양진영 기호일보 기자(광주광역시 출신)


파란만장했다. 광주 출신 청년이 대기업, 대학생, 보험사를 거쳐 기호일보 수원본사 기자로 입사하기까지. 양진영 기자는 “체육강사를 한 적도 있다”며 “다양한 경험이 기자로 사는 데 도움이 된다”고 웃으며 말했다.


기자가 된 이유는 재미있고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서였다. “공장에서 매일 제품에 나사 2400개씩 박는 일을 했어요. 어느 날 이게 뭐 하는 건가 싶더라고요. 그때 사진기자인 형의 삶이 즐거워 보였어요. 저도 기자가 돼야겠다고 생각하고 4년 만에 일을 그만뒀죠.”


▲양진영 기호일보 기자


그 뒤 언론고시에 뛰어들었지만 번번이 낙방했다. 보험사에 취업해 공부를 이어갔다. 그러다 수원에서 기자생활을 하는 대학 동창을 따라 이곳에 터를 잡았다.


수원은 낯선 곳이었다. 수습 시절 밤늦게 퇴근해 비좁은 고시원에 몸을 뉘일 때면 집 생각이 간절해지기도 했다. 그보다 연고 없는 서러움에 울컥한 날이 더 많았다.


취재할 때마다 ‘어느 고등학교 졸업했느냐’는 질문을 들었다. 유명한 고교 출신들이 주요 출입처에 포진해 있었고 그들은 중요한 취재원이었다. 오랜 시간 교류하며 어렵게 친해진 취재원이 고교동문인 다른 기자들과는 순식간에 마음 터놓는 모습을 보며 허탈할 때도 있었다.


“예전에 인터뷰한 지역인사는 학력을 고등학교까지만 써달라고 요구했어요. 서울에서 대학, 대학원을 나온 분이었죠. 수원에서는 고등학교가 더 중요하니까. 황당했어요. 지역색이 심하단 걸 다시 한 번 느꼈죠.”


하지만 연고가 없어 좋은 점도 있었다. 이해관계가 없으니 거리낌 없이 기사로 지적할 수 있다는 것. “후배니까, 선배니까 봐주는 것 없이 기자로서 마음껏 취재하고 기사 쓸 수 있었어요.”


수원 생활 3년 차. 그에게 수원은 ‘내 집이자 밥 빌어먹고 사는 곳’이 됐다. 지난 4월 총선현장을 취재하면서 이런 생각은 더 굳어졌다. 주소지를 옮겨 진짜 수원시민이 된 지도 오래다.


“경기도와 수원 이슈는 전국에서 화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곳에서 기자 생활하며 자부심을 느낍니다. 너무 뻔한 이야기지만, 작은 기사로도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기자가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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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심 사고 벗어나야”
노동현 TJB 기자(포항 출신)


“솔직히 이곳에 뿌리내리고 살줄은 몰랐어요. 하하.” 노동현 TJB 기자는 10년 전 대전에 오던 날을 떠올리며 말했다.


“서울에 있는 한 케이블방송사와 TJB의 최종면접일이 겹쳤는데 여길 택했어요. TJB가 지상파라는 게 메리트이긴 했지만 한창 세종시 이야기가 나올 때라 충청도 생활이 기대됐죠. 지역색이 옅다는 것도 좋았어요.”


▲노동현 TJB 기자

포항에서 나고 자라 서울에서 대학을 다닌 노 기자는 ‘대전 사람’이 다 됐다. 대전 토박이 아내와 결혼해 돌쟁이 딸을 키우고 있다. 이제 말투도 충청도 사람처럼 느긋해졌단다. “충청도 사람은 말이 느린데다가 서론도 길어요. 취재하면서 답답할 때도 있었죠. 그런데 10년 사니까 저도 그렇게 되더라고요.(웃음)”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대전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건 기자라는 자부심 덕분이었다. 지역 고등학교 출신보다 인적 네트워크는 좁았지만 실력으로 돌파할 수 있었다. 오히려 학연이 없다는 건 소신 있게 취재할 수 있는 바탕이 됐다. 주니어 시절 이달의 기자상 등 굵직한 상을 받으며 기자로서 성취감도 맛봤다.


다만 지역에 있다 보니 종종 뒤처진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었다. 트렌드와 멀어지면서 이대로 도태되는 것 아니냐는 불안도 느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이게 다 서울중심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란 걸 깨달았다고 했다.
“막 대전에 왔을 땐 너무 조용해서 어색했어요. 몇 년 지나 대전사람이 되고 나니 서울의 인구 과밀화가 심각한 것이더라고요. 그동안 ‘정상’의 기준을 서울로 잡고 판단했던 거죠.”


노 기자는 ‘제2의 고향’에서 큰 책임감을 느낀다고 했다. 대전은 그의 일터뿐 아니라 사랑하는 아내와 딸의 고향이다. 그는 좋은 취재와 리포트로 지역에 도움이 되고 싶다고 했다.


어느덧 10년 차 중견이 된 그는 지역사회에서 기자의 역할을 강조했다. “언론이 민주주의 발전을 저해할 수 있다는 책을 읽었어요. 언론이 망가지면 결국 시민이 피해를 보잖아요? 청렴한, 공정한 기사를 쓰는 기자이고 싶어요. 특히 지역 기자니까 지방자치에 약이 되는 기자가 돼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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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독려하고 경계해야죠”
박찬익 전주MBC 기자(목포 출신)


‘MBC 지역기자.’ 박찬익 전주MBC 기자의 꿈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기자가 되고 싶었다는 그에게 ‘MBC’와 ‘지역’은 확고한 목표였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할 무렵 외환위기로 언론계 채용이 줄어들었다. 꿈을 접고 대기업에 입사했지만 결국 사표를 냈다. 기자시험에 ‘올인’한 그는 얼마 뒤 꿈을 이뤘다.


“지역기자가 되고 싶었던 이유는 제가 지역 출신이기 때문이에요. 서울에서 큰 이슈를 다루는 것도 좋지만 지역 사람들이 차별받지 않고 살 수 있는 토대를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었어요. 전남 목포에 살면서 영남과 호남, 서울과 지역 간 차별을 많이 느꼈거든요. 대학교 1학년 때 MBC 기자를 만난 뒤로 MBC를 고집했어요. 거기선 좋은 기사를 쓸 수 있을 것 같았죠.”


▲박찬익 전주MBC 기자

지역MBC 여러 곳에 원서를 넣었지만 고배를 마셨다. 마침 전주MBC에서 시험기회를 얻었는데 영 끌리지 않았다. 전북은 시골이라는 인식이 강한 데다 전주에 가본 적도 없었다. “전북과 유일한 연고라면 대학생 때 임실로 농활을 갔다는 정도? 솔직히 시험 당일도 내려갈까 말까 고민했어요. 그런데 여기서 기자를 할 줄이야!”


다른 지역 사람이라는 건 전주에서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고향이 다르다고 차별하지 않고 포용해줬다. 자연스레 전주에 녹아들 수 있었다”며 “어느 지역 사람이 오든 쉽고 편하게 적응할 수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


분명 한계도 있었다. 초등학교부터 이어지는 지역 인맥이 없으니 “토박이들보다 정보력은 부족하다”고 했다. 그럼에도 누구에게나 편안하게 접근할 수 있어서 이 또한 기자로 사는 데 큰 걸림돌은 아니었다.


전주에서 만난 아내와 딸 셋을 낳은 그는 자신을 전주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13년 넘게 산 데다 세 딸의 본적도 모두 이곳이다. 고향이나 대학을 다닌 서울보다 전주가 더 편안하다고 박 기자는 말했다.


그는 익숙하고 편한 생활 속에서도 기자로서 나태함을 경계했다. “나이가 들수록 스스로와 타협하게 돼요. 늘 젊을 때처럼 날카롭게 취재하고 맹렬하게 비판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후배들이 MBC 기자라는 자부심을 품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어요.”

김달아 기자 bliss@journalist.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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