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미디어와 '괴물 트럼프'의 동침

[글로벌 리포트 | 미국]국기연 세계일보 워싱턴 특파원

▲국기연 세계일보 워싱턴 특파원

한국 정치권에서 정치인은 본인의 부음 기사만 빼고, 언론에 이름이 많이 날수록 득표에 도움이 된다는 말이 있다. 정치인의 부정적인 면이 부각되는 기사일지라도 이것이 그 정치인의 ‘인지도’를 올리는 긍정적인 효과를 낸다는 가설이다. 이 말이 한국 정치권에서 실제로 맞아떨어지는지 검증해 보지 못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미국 대통령 선거전에서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가 보란듯이 이 가설을 ‘참’으로 입증했다.


2016년 미국 대선은 승패와 관계없이 트럼프가 주인공이다. 트럼프는 공화당의 경선전을 주도했고, 본선에서도 여전히 이슈를 선점하고 있다. 신문과 방송 및 인터넷 매체, 소셜 미디어는 속된 말로 트럼프 때문에 먹고 산다. 트럼프의 원맨쇼가 없으면 이번 대선전은 싱겁기 이를 데 없을 것이다. 트럼프의 선거전은 욕하면서 보는 한국의 막장 드라마이다. 미국의 미디어는 헛소리, 헛발질, 황당무계, 안하무인, 좌충우돌 등을 번갈아 선보이는 트럼프의 곡예에서 도대체 눈을 뗄 수가 없다.


미디어는 오늘의 ‘괴물 트럼프’를 만든 일등공신이다. 미국의 미디어는 트럼프가 대선전에 뛰어드는 순간부터 균형 감각을 잃었다. 스트레이트 기사, 해설, 논평 등의 모든 보도 영역에서 트럼프로 도배질을 하고 있다. 미국의 언론은 트럼프가 대선 출마를 선언할 때만 해도 단막 코미디쇼로 여겼다. 그 쇼를 ‘과도하게’ 중계하다 보니 어느덧 트럼프가 대세가 돼 버렸다.


미국의 인터넷 매체인 ‘인디펜던트 저널리즘 리뷰’(IJR)는 공화당 경선전 초반전이었던 올해 3월18일까지 미국 언론의 균형 감각이 얼마나 무뎌졌는지 통계로 보여주었다. 그 당시까지 CNN이 공화당 예비후보를 언급한 비율을 보면 트럼프 55.4%, 마르코 루비오 10.2%, 젭 부시 10%, 벤 카슨 6.6%, 테드 크루즈 6.4% 등이다. 보수 성향의 폭스뉴스는 트럼프 47.6%, 루비오 13.1%, 부시 9.8%, 카슨 7%, 크루즈 6.6% 등이다. 그 당시까지 민주당 후보들을 포함해 언론의 보도를 돈으로 환산하면 트럼프 18억9800만 달러, 힐러리 클린턴 7억4600만 달러, 버니 샌더스 3억2100만 달러, 크루즈 3억1300만 달러, 부시 2억1400만 달러 등의 순이다.


뉴욕 타임스의 미디어 칼럼니스트 짐 루텐버그는 지난 7일자 칼럼을 통해 공화당 경선 과정에서 주요 언론의 트럼프에 관한 보도가 다른 후보에 비해 6배가 많았고, 트럼프가 20억 달러어치의 공짜 광고 혜택을 누렸다고 지적했다.


트럼프가 미국과 멕시코에 만리장성을 쌓고, 무슬림 입국을 금지하겠다는 등의 얼토당토 않는 소리를 떠벌리고, 언론이 이를 중계한 게 일부 공화당원들에게 제대로 먹혔다. 이번 미국 공화당과 민주당의 대선 후보 경선 투표에 참여한 사람은 전체 등록 유권자의 14%에 불과하다고 워싱턴 포스트가 최근 보도했다. 트럼프는 세계화의 물결 속에 패자로 전락한 저소득층 백인의 분노와 좌절감을 자극했고, 이것이 표로 결집돼 그가 공화당 후보 자리를 거머쥐었다.


그러나 본선은 다르다. 미국의 대선 투표율이 줄잡아 50∼60%에 이른다. 트럼프가 특정 계층만을 결집해 백악관을 차지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나르시시스트 트럼프는 여전히 고집불통이다. 자기를 비난한 사람은 ‘되로 받고 말로 주는 방식’으로 앙갚음하고, 상궤를 벗어나는 과격 발언을 일삼으며 이를 문제 삼는 언론과 맞짱을 뜬다.


괴물 트럼프를 만들었던 미국의 미디어는 이제 ‘트럼프 죽이기’에 나섰다. 월스트리트 저널, 폭스뉴스 등 보수 언론도 트럼프 편들기에 지쳐 있다. 미국 주요 방송과 언론을 보면 트럼프 때리기 일색이다. 급기야 뉴욕타임스의 루텐버그는 “트럼프와 같은 비이성적인 후보를 다루는 언론이 이성적일 수가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폭스뉴스의 하워드 커츠는 “두 후보가 경합하는 선거에서 한 후보를 일방적으로 매도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상대 후보를 돕는 결과를 초래하는 보도 행태가 정당화될 수 없다”고 맞섰다.


트럼프의 등장을 계기로 미국 기자들 뿐 아니라 한국 기자들도 ‘공정 보도’의 현주소와 ‘언론의 정도’ 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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