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의 '황색화', 이대로 괜찮은가

[우리의 주장] 편집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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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19세기 인쇄 대중화 이후 유럽에서 가장 먼저 출판산업이 발달한 곳이다. 특히 대중의 오락거리인 ‘황색언론’의 메카로도 꼽힌다. ‘더선’은 1970년부터 3면에 상반신을 탈의한 여성 모델의 사진을 실으며 재미를 톡톡히 봤고, ‘미러’를 비롯한 다른 매체들도 유명인의 시시콜콜한 사생활을 캐내려 도청과 해킹까지 감행하며 특종 경쟁을 벌이다가 2011년 ‘뉴스오브더월드’ 폐간사태까지 빚은 바 있다. 하지만 정론을 지향하는 고급 언론들도 다수이다. 디지털 저널리즘 시대를 주도하는 ‘가디언’, 풍부한 통찰을 제공하는 ‘이코노미스트’를 비롯해 영어권의 주요 언론이 태동한 곳도 바로 영국이다. 말하자면 ‘언론 생태계’에서 다양한 콘텐츠가 생산돼왔다.


영국의 사례에 비추어 한국의 현실을 보자. 1883년 순한문으로 발행된 ‘한성순보’ 창간 이후 일제강점과 광복, 독재와 해직사태, 언론통폐합, 민주화를 거치면서 다수의 언론사들이 명맥을 이어왔다. 대중의 오락에 충실한 스포츠지와 주간지들이 있었고, 정론지들은 무거운 이슈들에 천착했다. 하지만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수익’이라는 미명 하에 생태계 교란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갯끈풀’이 갯벌을 파괴하고, ‘배스’가 민물에서 포식하듯 전 언론의 ‘황색화’가 진행 중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최근의 사례는 모 남자 감독과 여성 배우의 ‘불륜 스캔들’이다. 여러 매체에서 온라인으로 앞다퉈 기사를 생산했다. 압권은 모 잡지에서 공개한 감독의 부인과 배우의 모친의 ‘카카오톡 메시지’였다. 지난 22일 오전부터 ‘바이럴’을 타면서 ‘알려졌다’로 복제에 재복제되며 온라인에 퍼져나간 이 기사에 대해 감독의 가족 측은 언론중재위 제소 입장을 밝혔다. ‘허위’ 사실이라는 것이다. 해당 매체에 정정 요청을 했지만 ‘조작된 카톡 메시지’를 내린 것 이외에 더이상 조치가 없다고 이들은 주장했다. 이 뿐만인가. 예능인 박유천의 연쇄 성폭행 혐의에 대해서도 ‘일단 질러’식의 기사들이 양산됐다. “피해자 측이 먼저 거액을 요구했다” “사건일에 박씨는 해외에 있었다”처럼 한 쪽의 주장만이 실린 뉴스들이 트래픽을 끌어모았다.


한국에서 발전은 크게 ‘양적 개념’으로 인식된다. 저널리즘의 디지털 적응도 크게 다르지 않다. 순방문자나 기사뷰수가 얼마나 되는지, 사회관계망서비스 페이스북에서 운영하는 언론사 공식계정의 구독자가 ‘얼마나’ 되는지에 집착한다. 더 많은 숫자는 더 좋은 성적으로 인식된다. 그러다보니 저널리즘의 체질 변화가 다급한 지금도 ‘얼마나 많이’가 ‘어떤 주제와 내용’을 압도하는 부작용이 벌어진다. 종이신문이나 방송에는 체면상 내보내지 않을 저질스러운 내용들이 온라인에서는 마구잡이로 생산된다. 그러면서 언론은 ‘독자가 궁금해 하는 소식을 전할 뿐’이라며 짐짓 점잖은 척을 한다. 과연 그럴까. 가십성 스캔들까지 ‘염소 만난 피라냐떼처럼 달려들어 한 입이라도 더 먹으려는’ 언론을 정말 정론이라 부를 수 있는가. 플랫폼에 따라 분열적으로 행동하는 언론이 과연 독자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온라인 저널리즘에 대한 사회적 합의점이 취약한 상황에서 먼저 ‘황색 저널리즘’의 깃발을 꽂은 것은 언론사 자신이 아닌가.


이런 선정적인 보도라는 ‘악화’가 쏟아져 나오면서 온라인 생태계에서 정론탐사보도는 마치 1급수에 사는 버들치같은 위기에 놓였다. 내부에서 자정하지 않으면 현재로서는 누구도 걸러낼 방법이 없다. 정론 없이는 건강한 민주주의도 없다. ‘브렉시트’를 무책임하게 선동했던 영국의 타블로이드 신문들은 결국 영국을 몰락으로 이끌고 말았다. 우리에게도 남의 이야기가 아닐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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