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많았던 BBC 백서, 드디어 공개

[글로벌 리포트 | 영국]김지현 골드스미스 런던대 문화연구 박사과정

▲김지현 골드스미스 런던대 문화연구 박사과정

영국 브렉시트 투표 뒤에나 공개될 것으로 알려졌던 BBC ‘백서(White Paper)’가 예상보다 일찍 발표되었다. 지난 12일 영국의 문화미디어스포츠부(DCMS)는 ‘미래를 위한 BBC:독창성의 방송사(A BBC for the future:a broadcaster of distinction)’라는 제목으로 BBC 왕실칙허장 갱신에 대한 공적 협의(Public Consultant) 결과를 정리한 의회 제출용 정책제안서를 발행하였다. 이 제안서의 내용은 2017년부터 효력을 지니는 새로운 왕실칙허장에 그대로 반영된다. 왕실칙허장은 일반적으로 BBC의 자금조달과 운영, 책임, 일반적 목표를 정의하는 국가 문서로서 현재까지 10년마다 갱신돼 왔다.


영국 정부는 예비 정책제안서인 ‘녹서’를 지난 해에 발행한 뒤, 약 일 년 동안 BBC 수장들과의 협상 및 공중, 학계, 산업을 대상으로 공적 협의를 진행해왔다. 그 협의 결과가 반영된 ‘백서’가 공개되면서 칙허장 갱신의 긴 여정이 마무리되고 있다. 하원에서 이에 대한 별도의 투표를 하지 않기 때문에 칙허장 갱신의 최종 결과물이라 볼 수 있다. 버킹엄 궁전의 프라이비 의회(The Privy Council)에서 여왕의 승인을 거쳐 곧 칙허장 갱신은 완료된다.


이번 칙허장 갱신 기간 동안 지난 해 문화부 장관에 새롭게 취임한 존 위팅데일(John Whittingdale) 장관과 BBC의 토니 홀(Tony Hall) 사장은 치열한 전투를 펼치며 세간의 관심을 끌어왔다. 지금으로부터 일 년 전, 총선에서 대승을 거두며 재집권에 성공한 보수당 내각은 ‘BBC 비평가’라고 불리는 보수당 중진인 존 위팅데일 문화부 장관을 기용해 한풀이라도 하듯, 그 동안 보수당 내부에 쌓여 있던 BBC에 대한 불만을 ‘녹서’에 쏟아부었다. ‘녹서’를 통해 BBC의 서비스 규모와 범위를 재정의하라는 강력한 요구와 함께 BBC의 독립 규제기관인 BBC 트러스트의 폐지를 제안하며, 광고 없는 BBC의 ‘생명줄’이라 할 수 있는 수신료제 역시 ‘가까운 미래’에는 존속되기 힘들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급기야 지난 여름, 조지 오스본(George Osborne) 내무부 장관과 존 위팅데일 장관은 토니 홀 사장을 불러 그동안 정부의 복지예산에서 지급되던 75세 이상의 노령인구 무상 수신료를 BBC 측에 떠넘기까지 했다. 이 사건은 한동안 일간지들을 통해 ‘밀실 거래’라고 신랄하게 비판받았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토니 홀 BBC 사장이 그 과정에서 호락호락 대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녹서’ 이후에 숨막히게 진행되어온 협상 과정에서 그는 정부 측에 맞서 ‘잃는만큼 얻어내는’ 전략을 펼쳐왔다. 논란이 된 수신료제는 다음 칙허장 갱신까지 그 존속이 결정되었고, 문제가 된 노령인구 무상 수신료를 부담하는 대신 정부로부터 물가인상률에 맞춰 수신료제를 인상하는 것과 BBC월드 서비스에 대해 향후 5년동안 2억8900만 파운드의 지원금을 받는 것을 백서 속에서 약속받았다. BBC로서는 조금도 손해보는 장사가 아닌 것이다. 이번 백서의 공개 직후 ‘가디언’의 로이 그린스레이드(Roy Greenslade)가 칼럼에서 “이번 ‘백서’는 토니 홀 사장의 협상기술에 대한 찬사를 담고 있다”고 말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현지의 유력 일간지들 역시 이번 백서가 (적어도 ‘녹서’에 비해서는) BBC측에 상당히 유리하게 작성되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BBC 백서 표지

물론 이번 ‘백서’를 BBC의 장밋빛 미래를 보장하는 황금문서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BBC를 앞으로 성가시게 할 조항이 ‘녹서’ 이후 새롭게 추가되었기 때문이다. BBC의 독립 규제기관인 BBC 트러스트가 폐지되고 그 규제 및 감독 기능을 영국정부의 방송통신 규제기관인 오프콤(Ofcom)에 이전하게 된 것이 대표적인 예다.


백서는 지난 3월에 BBC의 거버넌스 및 규제에 대한 평가보고서로서 발표된 ‘클레멘티 보고서’의 이사회 구성 제안을 그대로 따르겠다고 밝히고 있다. 먼저 정부 주도하에 4명 이하의 비상임 이사와 2명 이상의 상임 이사를 선발한 후, 이들이 최대 14명(최소 12명)이 될 이사진을 구성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새롭게 규제기관이 될 오프콤의 수장을 정부가 임명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BBC의 모든 의사결정기구와 감독기관에 대한 정부의 영향력은 강력해지게 된다.


지난 호 칼럼에서도 다뤘지만 이는 BBC 역사에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이다. 최근 BBC는 이와 관련 “BBC 트러스트 폐지 이후 새롭게 구성되는 ‘일원화된 이사회(unitary board)’의 상당한 이사들이 정부에 의해 위촉되는 것이 불안하다”고 보도한 바 있다. 이러한 여론이 나올 것을 예상한 듯, ‘백서’를 공개하며 위팅데일 장관은 “공개 지명과정을 거쳐 선발한 중역들과 함께 BBC가 이사회 구성원의 대부분을 임명할 것”이라고 밝혔지만, 여전히 일각에서는 그 과정에서 정부의 입김이 강력하게 들어갈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의 목소리를 내놓고 있다.



김지현 골드스미스 런던대 문화연구 박사과정의 전체기사 보기

배너

많이 읽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