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을 위한 변명

[스페셜리스트 | 금융] 유병연 한국경제신문 차장

▲유병연 한국경제신문 차장

정치인은 물론 정책가들도 종종 부족한 논리를 포장하기 위해 교묘한 수사(修辭)를 동원한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한국판 양적완화’도 그런 의혹을 받는 표현이다. 한국판 양적완화는 2008년 금융위기 때 국공채를 직접 매입한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양적완화 정책에 빗댄 것이다. Fed도 어려울 때 나서 양적완화를 했으니 한국은행도 따라야 한다는 ‘당위성’이 배어 있다.


하지만 정부가 추진하는 양적완화는 부실기업 도산을 막아주는 ‘구제금융’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한국판’이란 수사로 포장했지만 ‘공적자금 투입’에 다름 아닌 말이다. 전통적 양적완화는 미국과 일본처럼 중앙은행이 채권을 사들여 직접 돈을 푸는 데 비해 한국판 양적완화는 한은이 산업은행의 산업금융채권(산금채)을 인수하거나 자본확충펀드를 지원해 기업구조조정을 돕는 방안이다.


미국도 기업 구조조정에 발권력을 동원한 경험이 있다. Fed는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진 2008년 민간 보험회사 AIG가 유동성 위기에 빠지자 1125억 달러를 직접 지원했다. 금융기관 부실이 금융시스템 리스크로 전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지 특정 산업을 돕기 위한 조치는 아니었다. Fed의 AIG 지원 이후 미 의회는 도드-프랭크 법안을 통해 중앙은행이 특정기관을 선별 대출하는 길을 봉쇄해 버렸다. 이어 2015년 미 법원은 Fed의 AIG 직접 지원은 ‘불법’이라고 판결했다.


한국판 양적완화의 가장 큰 문제는 발권력을 동원하려는 정부의 숨은 의도에 있다. 여소야대(與小野大)로 재편된 국회의 높은 벽이나 조세 저항을 우회하기 위한 ‘꼼수’라는 지적이 나온다. 한은 발권력을 이용하면 재정을 동원하지 않고 국회 의결을 거치지 않아도 된다. 책임을 피하기 위해 손쉽지만 위험한 방식을 동원하려 한다는 비판이 나오는 대목이다.


어느 정권에나 중앙은행의 발권력은 ‘달콤한 유혹’이다. 화수분처럼 필요할 때마다 무한대로 꺼내 쓸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행법에도 길은 열려 있다. 한국은행법 제80조는 영리기업이 금융기관으로부터의 자금조달에 중대한 애로가 발행할 경우에 한은이 여신을 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부작용이 크다. 그 파장은 불특정 다수 국민과 경제 전방위에 무차별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통화공급 확대로 인한 인플레이션이 국민의 소득을 실질적으로 줄이는 ‘인플레세(inflation tax)’가 대표적이다. 중독성도 강하다. 이번 해운·조선업 구조조정을 위해 발권력을 동원하면 향후 다른 업종 지원에도 한은이 나서지 않을 명분이 없다. 돈을 찍어 기업 부실을 지원함으로써 생길 수 있는 ‘도덕적 해이’도 경제를 망칠 수 있는 독이다. 때문에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미국과 EU 국가들은 부실자산 매입 자금을 모두 의회승인을 거쳐 정부 재정으로 조달했다. 디플레가 우려되는 상황이라고 해서 구조조정을 위한 통화증발이 면죄부를 받을 순 없다.


산업 구조조정은 한은의 책무가 아니라 정부가 재정으로 해야 할 역할이다.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쓸 이유는 없다. 여당과 야당 모두 구조조정의 필요성에 동의하는 만큼 국회에서 시급히 논의해 풀어할 문제다. 그게 어렵다고 발권력을 동원한다면 후대에 더 큰 후유증을 불러오게 된다. 모든 국가가 예외 없이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법으로 보장하고 지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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