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년 만에 다시 찾은 광주에서 나 역시 그런 (큰 의미의) 사건과 상황 속에 있을 수 있었다는 것에 겸허함과 기쁨을 느낀다.”
때마침 봄비가 그친 5월의 아침, 36년 전 광주 민주화 항쟁 당시 시민군의 최종 저항지였던 광주시 동구 옛 전남도청 일대가 들썩거렸다. 항쟁 시기 사태를 취재하고 보도했던 외신기자들이 지난 16일 당시 가장 급박했던 이곳을 다시 찾은 것.
노먼 소프는 당시 경험에 대해 “5월21일 수요일 서울에서 광주로 내려갔다. 카메라와 완장을 본 시민들이 기자인 걸 알고 사람들이 살해당하고 있다고 전해왔다. 소개해 준 작은 병원에서 총상 입은 환자와 총검에 찔린 소녀를 만났다. 추가 시신 확인을 위해 부탁했더니 확성기가 달린 차 뒷좌석에 나를 밀어넣고 기독교병원으로 데려갔다. 금남로에선 군인들의 총격을 맞지 않기 위해 굉장한 속력을 내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이어 “시민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결코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광주의 참상을 세계에 알린 ‘푸른눈의 산 증인’들은 옛 도청 별관 1층 복도로 발을 내디디며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을 지었다. 외신기자들은 ‘상전벽해’한 광주의 모습에 놀라움을 표하면서도 과거의 흔적을 찾기 위해 분주히 눈길을 움직였다. 자신들이 아는 ‘광주의 진실’을 두고 가벼운 언쟁을 벌이며 언론인다운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브래들리 마틴은 5·18민주화운동 기록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5월26일 하루 동안 광주에 있었다. 항쟁 지도부가 기자회견을 열었고, 윤상원 씨를 처음 만났다”고 회상했다. 그는 “윤상원에게 ‘압도적인 힘을 가진 군사정권이 처들어오는데 어떻게 할거냐’고 질문했는데, 그는 ‘끝까지 싸울 것이다. 자신과 동료들은 죽을 준비가 돼 있다’고 말한 것을 기억한다”고 전했다. 이어 “그들의 희생으로 지금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도날드 커크는 “광주 사태 발생 며칠 전부터 사태를 주시하고 있었다”고 술회했다. 그는 “당시 학생들이 미국 대사관에 돌을 던지고 시위를 해서 전화를 해 물어보니 대사관에선 ‘별일없다’고 답했다”면서 “내가 광주로 다시 내려간 건 18일 이후였다. 좁은 길을 따라 뒷골목으로 돌아 들어간 기억이 난다. 당시 시민들이 만들어 준 프레스카드를 갖고 다녔다. 그때 사람들이 살육당하고, 거리에 관들이 놓여있는 참상을 봤다”고 했다. 그러면서 “광주민주화 항쟁이 없었다면 현재 한국의 민주주의는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외신기자 4인은 이날 오후 망월동 5·18 구묘역에서 엄수된 고 위르겐 힌츠페터의 공식 추모식을 찾기도 했다. 힌츠페터의 부인 에델트라우트 브람슈테트, 처제 로즈비에타 브람슈테트 미트, 사사나 구스마오 전 동티모르 대통령 등이 참석한 추모식에서 외신기자들은 유가족을 위로하고 같은 시기, 같은 현장에서 뛰었던 동료의 죽음을 추모했다.
이들은 “그와의 만남을 기억한다”면서 존경과 경의를 표한다고 밝혔다. 도날드 커크는 “그와 함께 책을 만들었고, 이 때문에 서울에서 만나기도 했다”며 특별한 감회를 전하기도 했다. 에델트라우트 브람슈테트 여사는 이날 “남편이 항상 말했듯 그의 소원에 따라 이곳에 자리잡게 된 점을 감사한다. 역사적인 장소에 묻히게 해준 걸 기쁘게 생각한다”고 소회를 밝혔다. 사사나 구스마오 전 동티모르 대통령은 눈물짓는 유가족에게 “그는 희망을 남기고 죽었다”고 말해 장내를 숙연케 하기도 했다.
힌츠페터는 5·18 당시 독일 공영방송(ARD-NDR)의 일본 특파원으로 광주의 참상을 전했다. 이는 군부독재의 폭압을 전 세계에 알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지난 1월 투병 끝에 향년 79세로 타계한 고인은 '죽으면 광주에 묻어달라'며 2005년 5·18재단에 자신의 손톱과 머리카락 등 신체 일부를 맡겼다.
노만 소프는 “오늘 아침 전두환 전 대통령이 (5·18에 대해) 사과한다는 루머를 들었다”면서 “앞으로 이런 사과가 실제 이뤄지고 이에 걸맞은 책임을 질 수 있는 일이 있길 바란다”고 밝혔다. 브래들리 마틴과 도날드 커크는 최근 초등 6학년 사회 교과서 등을 통해 불거진 5·18왜곡에 대해 “미국 50개 주도 원주민 학살 등을 두고 역사의 진실을 담지 않는 등 제 각각”이라며 “광주도 역사적 사실을 (교과서에) 담기 위해 계속 투쟁하고 노력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날 광주 시민들과의 대화 자리에는 당시 정부의 탄압 등에 맞서다가 해직 등 고초를 겪었던 국내 기자들이 참석해 감회를 밝히기도 했다. 당시 내신 기자들은 계엄사의 탄압 때문에 목숨을 건 취재활동을 하고서도 보도는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있었다. 이와 관련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는 이날 오전 열린 기자회견에서 “당시 전국 언론인들이 검열항의와 정권퇴진, 언론자유 보장을 촉구하다가 불법해직과 영구취업 불가 조치 등을 받았다”며 “광주 민주화 항쟁은 광주 지역 뿐 아니라 전국 언론인들의 투쟁이기도 하다”는 입장을 발표하기도 했다.
당시 해직됐던 노병유 전 광주CBS 본부장은 “36년 전 이 자리가 CBS방송국 자리였다. 창문으로 현장을 다 볼 수 있었던 자리인데 그 자리에서 이런 만남을 갖게 돼 감회가 새롭다. 1980년 5월 16일 오후 5시 이 건물 5층 강당에서 언론인 양심선언을 했다”고 전했다. 그는 “외신기자들에게 고마운 것은 아무도 광주에 대해 보도할 수 없었는데 이분들이 보도를 해줘서 우리들도 숨통이 조금은 텄다는 것”이라며 “감사하다는 말을 36년 만에 한다”고 밝혔다.
80년 해직기자들과 외신기자들의 방문은 광주시와 광주전남기자협회가 공동 주최한 ‘5·18 당시 내·외신기자 초청행사’의 일환으로 이뤄졌다. 이들은 4박5일간의 일정으로 광주 일원에 머물며 제36주년 5·18전야제·기념식 참석, 고 윤상원 열사 생가방문 및 유가족 면담 등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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