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저임금 인상과 기본소득

[글로벌 리포트 | 미국]손제민 경향신문 워싱턴특파원

▲손제민 경향신문 워싱턴특파원

미국 민주당의 대선주자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은 자유무역협정(FTA)이 미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노동자들의 삶의 질을 낮춘다며 반대 소신을 펴고 있다. 뉴욕 경선을 앞두고 지난 14일 브루클린에서 열린 민주당 TV 토론회에서 그는 이러한 견해에 대한 도전을 받았다.


사회자가 “당신이 (자유무역 반대를 통해) 미국에 일자리를 다시 가져오겠다고 하는 어떠한 방법도 미국 내 물가를 상승시켜 결국 빈민과 중산층에게 피해가 돌아갈텐데 그 점은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었다. 샌더스의 대답은 “시간당 최저임금을 15달러로 올리는 것에서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결국 맥도널드 햄버거를 사는데 몇 센트 더 내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우리 경제가 필요로 하는 것은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하는 제조업 섹터”라고 덧붙였다. 사회자는 더 이상 추궁하지 못했다.


이날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은 자신의 기존 입장을 뒤집고 의회가 연방 최저임금 15달러 법안을 통과시키면 도장을 찍겠다고 밝혔다.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불찬성, 대륙종단 키스톤 송유관 건설 반대 등에 이어 또다시 샌더스의 공약을 수용해 좌클릭한 것이다.


이상적으로, 선거는 정책 대안을 놓고 공개 경쟁을 펼치는 장이다.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 경선은 그런 기능을 거의 하지 못하고 있지만 민주당은 어느 정도 그런 모습을 띠고 있다.


힐러리가 최저임금에서 샌더스 입장을 수용하게 된 데는 뉴욕과 캘리포니아가 최근 최저임금 15달러 법안을 통과시킨 것이 영향을 미쳤다. 캘리포니아는 10달러인 최저임금을 2022년까지 15달러로 올릴 계획이다. 뒤질세라 뉴욕도 대도시의 경우 10인 이상 사업장은 2018년까지 최저임금을 15달러로 올리도록 법제화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7.25달러인 연방 최저임금을 10.10달러로 올리려는 시도가 공화당 의회의 반대로 무산된 상황에서 미국사회 여론을 주도하는 두 주의 결정과 힐러리의 입장 번복은 2011년 월가 점령시위 이후 맥잡 노동자들이 주도한 최저임금 인상 운동의 승리라 할 수 있다.


또 하나 눈여겨 볼 현상은 최저임금 인상을 넘어 기본소득 논의가 미국 주류 담론의 영역에 다시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기본소득은 노동의 유무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일정 정도의 소득을 보장한다는 점에서 노동을 전제로 하는 최저임금 인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개념이다. ‘일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 어떻게 기본적인 소득을 보장하느냐’는 강력한 통념은 ‘할 수 있는 일이 점점 사라져간다’는 현실에 도전받고 있다.


미국의 사회이동성에 천착해온 리처드 리브스 브루킹스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임금을 통한 노동시장 메커니즘이 자본 대비 노동 생산성 향상에는 계속 기여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노동시장의 또 다른 중요 기능인 소득배분 면에서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하는 현실을 지적하며 기본소득 논의를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때라고 밝혔다. 그는 점점 더 많은 정책 전문가들이 최저임금 인상, 이윤공유, 직업훈련·재교육 등의 수단은 엄청나게 커져가는 상처를 군데군데 덮어서 가릴 뿐 상처 자체의 치유에는 역부족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고 했다.


미국에서 기본소득 논의는 1970년대 닉슨 행정부가 가구당 1600달러 현금을 지급하려고 했던 계획이 ‘일하지 않는 사람에게 어떻게?’라는 통념을 넘지 못하고 전국적 실시가 좌절된 이후 공론장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원유생산에서 나온 재정 수익을 이용해 알래스카주 차원에서 실시되고 있고 최근에는 스위스, 핀란드, 영국 등 유럽국가들에서 중요한 정책 대안으로 검토되고 있다.


리브스는 “프로테스탄트의 근로 윤리가 강한 미국에서 기본소득은 기존 사회계약으로부터 엄청난 도약을 의미한다”면서도 “샌더스, 트럼프 현상은 뭔가가 아주 심각하게 부러졌음을 보여주고 급진적 아이디어가 대유행이다. 기본소득이 주변부에서 들어오고 있다. 그것이 주류담론으로 들어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도, 배제해서도 안된다고 본다”고 했다.


한국에서 4·13 총선으로 ‘세상이 바뀌었다’고들 한다. 세계 자본주의 중심이라는 곳에서도 세상은 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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