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는 나이로 하는 게 아니다

[기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제1부-기자들이 사는 법 ⑤뉴스룸의 고참기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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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갈수록 입지 좁아지고
비편집국 진출도 경쟁 치열
저널리즘보다 실적이 우선
이직·전직도 녹록지 않아

현장 뛰는 선임·전문기자들
온라인으로 취재영역 확장
재입사해 전문기자 활약도
“경험 살릴수 있는 장 많아야”


머리는 이미 천장에 닿았는데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은 많아지면서 설 땅은 점점 좁아지고 있다.
국·실장을 맡고 있으면 비빌 구석이라도 있지만, ‘무관’의 고참 기자들은 위·아래 시선이 신경 쓰일 수밖에 없다.


올해부터 정년이 60세까지 연장된다고 해 안도할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다. 공들여 왔던 족적이 한순간 밥 만 축내는 ‘식충’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하지만 위기의 50대 이상 고참 기자들은 30여 년 전 입사 때 가졌던 각오를 재무장하고 미디어업계에 불어 닥친 변화의 바람에 맞서며 새로운 ‘롤 모델’을 만들어 가고 있다.

갈수록 좁아지는 선택의 폭
고참 기자들도 혈기 왕성한 시절이 있었다. 독재 권력에 맞서 시위현장에선 선봉에 섰고 동료·선후배들과 함께 넥타이 부대로 참여할 정도로 민주화 열망을 가슴 한구석에 품었던 세대다. 1988년 서울 올림픽과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지켜보면서 온 국민과 함께 환호했다.


그렇다고 화려한 여정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상 초유의 IMF금융구제(1997년)와 글로벌 금융위기(2008년) 등을 거치면서 동고동락했던 동료·선후배들의 자리가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것을 숨죽이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베이비부머 세대(1955~1963년생)인 이들의 노정을 보면 우리 현대사와 맞닿아 있다.
호시절에 기자는 기사만 잘 쓰면 됐다. 넘쳐나는 광고물량 덕에 주요 광고주들이 지면 광고를 배정받기 위해 줄서야 하는 시기도 있었다.


▲언론계에도 변화의 물결이 일면서 직책과 나이를 떠나 현장을 달리는 고참급 기자들이 많아지고 있다. 사진 상단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김종혁 JTBC 대기자 겸 뉴스현장 앵커(전 중앙일보 편집국장·JTBC제공), 현역 최고참 기자인 CBS 안윤석 대기자(전 CBS 상무), 이대근 경향신문 논설위원(전 경향신문 편집국장), 성한용 한겨레 선임기자(전 한겨레 편집국장).

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 신문산업 위기와 맞물려 상황은 반전됐다. 한 국실이나 계열사를 책임지는 수장으로 올라가면서 저널리즘보다 실적이 지상 최대 과제가 됐다. 회사는 전후사정 따질 것 없이 전년도 이상의 실적을 요구하다 보니 해를 거듭할수록 매출 압박수위는 점점 높아지고 있다.


A신문사 고위 간부는 “매년 새로운 사업을 원하는데 언론사에서 할 수 있는 사업이 뻔하다보니 고민이 많다”며 “많은 날은 하루에도 4~5번 회의를 하다보면 진이 다 빠진다”고 말했다.


과거엔 데스크, 부장, 편집국장 등을 거쳐 논설위원실로 가는 게 수순처럼 여겨졌지만 어느 새 사업국 등 비편집국 영역도 기자들의 몫이 됐다. 비편집국 발령을 수치로 여기고 회사 문을 박차고 나갔다는 것도 술자리에서 무용담 정도로만 입에 오르내릴 정도다.


기자사회 역시 관리급 이상 간부는 ‘회사 매출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게 불문율처럼 여겨지고 글만 쓸 줄 아는 기자가 오히려 ‘샌님’ 취급받기 일쑤다.


갈수록 경쟁은 치열해 질 수밖에 없다. 도태되면 만회가 힘들 뿐더러 전·이직도 쉽지 않은 나이기 때문이다. ‘싫든 좋든’ 현 직장에서 정년을 맞든가, 회사 문을 박차고 나와야 하는데 회사 울타리가 사라지는 순간 비정규직이 되거나 개인 사업자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지난해 초 언론진흥재단에서 발간한 ‘2014 한국언론연감’에 따르면 신문산업 종사자 중 50세 이상이 차지하는 비중은 21.9%로 30~34세(16.8%), 35~39세(16.7%), 40~44세(15.1%), 45~49세(15.0%), 29세 이하(14.5%)를 압도했다.


실제로 최근 3년 간 국장급 언론사 간부가 기업으로 간 사례는 이준 전 TV조선 보도본부 부본부장(당시 삼성전자 기획팀 전무), 백수현 전 SBS보도본부 부국장(당시 삼성전자 커뮤니케이션팀 전무), 김상영 전 동아일보 상무(당시 CJ 부사장·이상 2013년) 등 손에 꼽힐 정도다.


여러 모로 남아 있는 게 낫다는 판단이 크게 작용했을 수도 있지만 그만큼 연차가 쌓일수록 선택의 폭은 좁아지고 감안할 점은 많아진다는 것을 방증한다.


88년에 입사한 B신문사 기자는 “외부에서 보는 것과 달리 비편집국 국·실장 자리 역시 노리는 기자들이 많을 정도로 위로 올라 갈수록 내부 경쟁이 치열해 진다”고 말했다.

은퇴 이후만 생각하면 ‘막막’
은퇴 이후를 위한 노후자금 마련은 언감생심이다. 타 업종에 비해 저임금이다보니 자연스럽게 퇴직금이 적고 이마저 중간정산을 받아, 회사를 나갈 땐 쥐꼬리만큼의 은퇴자금만 손에 쥘 뿐이다.


반면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냉랭하다. 임금피크제 도입을 앞두고 일자리를 빼앗는 암적 존재로 취급받거나 회사 경쟁력만 갉아먹는 ‘뒷방 늙은이’ 취급을 받고 있다.


C방송사 28년차 기자는 “1980·90년 두 자릿수 경제성장률을 구가하던 시절에 기자생활은 경제적인 면이나 사회적 대우에서 아쉬울 게 없었던 시기였지만 IMF사태로 직격탄을 맞았다”며 “이 때 받은 타격으로 빚 갚는 데만 5~6년 걸렸고 곧바로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또다시 주저앉게 됐다. 노후 대책은 먼 나라 얘기 같다”고 말했다.


더구나 은퇴 이후 국민연금 등을 받을 때까지 소득이 단절되는 ‘소득절벽’만 생각하면 막막해진다는 게 이들 세대 기자들의 공통분모다.


D종합일간지 50대 간부는 “중간 정산한 퇴직금은 어디에다 쓴지 모르게 나갔다”며 “6년 뒤 회사를 은퇴할 때 고작 몇천만원 정도만 손에 쥘 수 있는데 이 돈 가지고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걱정했다.


KB금융지주경영연구소가 지난해 7월 25~59세 전국 성인남녀 2906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2015년 한국 비은퇴 가구의 노후준비 실태’에 따르면 노후생활에 필요한 자금은 월평균 226만원인 것으로 파악됐다.


하지만 언론계 밖은 혹독한 현실이 기다릴 뿐이다. 통계청이 지난해 12월 발표한 ‘2014년 기준 기업생멸 행정통계’에 따르면 새로 생긴 기업(소규모 창업 포함)의 39.9%는 1년 안에 문 닫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 10곳 중 4곳은 1년도 못 버틴다는 얘기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상황이 언론사 규모가 작고, 지방으로 내려 갈수록 심각해진다는 점이다. 기자들이 올라갈 수 있는 최정점이 사실상 편집국장인데 그 연령대마저 갈수록 낮아지다 보니 진로에 대한 고민이 커질 수밖에 없다.


더구나 편집국장을 역임한 뒤 지역주재 기자로 발령 나는 등 전관예우를 꿈꾸기도 힘든 실정이다. 박현수 전 경인일보 편집국장(당시 경인일보 인천본사 경영본부장 겸 편집제작국장)의 경우 6개월 전까지 편집국장을 맡았다가 인천시 대변인으로 옮기자 비판도 컸지만 일부에서 동정론이 나온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E지방언론사 편집국장은 “편집국장 출신들이 나가면 신생 매체에 재입사해 시청이나 도청을 출입하면서 그간 익힌 안면을 가지고 광고를 수주하는 게 주된 역할”이라며 “후배들 보기에 좋은 모습이 아니기 때문에 나만큼은 그렇게 하지 말자는 차원에서 평소 관심 있는 분야의 학위를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장 누비는 고참기자들
하지만 고참급 기자사회에서도 변화의 물결이 일고 있다. 편집국장 출신이라고 해 예전처럼 엉덩이가 무거워지는 게 아니라 활동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한겨레 성한용 선임기자(성한용의 정치 막전막후), 경향신문 이대근 논설위원(이대근의 단언컨대), JTBC 김종혁 대기자(뉴스현장 앵커) 등이 대표적인 사례인데 이들은 지면을 넘어 방송·온라인 등 이종매체까지 넘나들고 있다.


CBS 안윤석 대기자(67세)를 비롯해 한겨레 김영환 기자(61세) 등은 이미 은퇴할 나이가 지났지만 한국판 ‘헬렌 토마스’(미국 백악관을 50여년 동안 출입한 기자)를 꿈꾸며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특히 안 대기자는 2008년 정년퇴임했지만 재입사해 북한분야 전문기자로 활동 중이다. 필드에서 뛰는 현역 중 최고참 기자지만 어김없이 새벽 5시30분부터 일과를 시작해 밤 11시가 되어야 노트북을 덮을 정도다.


안윤석 대기자는 “회사 인력운영 방침도 중요하지만 현장에서 뛰어보겠다는 기자 개개인의 각오가 우선돼야 한다”며 “후배들한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1단 보도 자료 처리에서부터 기획기사까지 다 처리하다 보니 하루 평균 10건의 기사를 쓰고 있다. 업무 강도는 약하지 않지만 그래도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 밖에도 선임기자제나 전문기자제가 활성화되면서 현장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50대 이상 선임·전문기자들이 많아지는 추세다.


이들의 공통점은 화면이나 종이를 넘어 온라인은 물론 팟캐스트 등 디지털 영역에서도 새로운 이정표를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이종매체 간 영역을 넘나들면서 사내에도 디지털 마인드를 전파시키는 첨병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더구나 이들은 지난 30년 간 현장을 누비며 갈고 닦은 경륜과 통찰력, 콘텐츠 등을 무기로 독자들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고 있다.


김종혁 JTBC 대기자 겸 앵커(전 중앙일보 편집국장)는 “과거와 달리 편집국장을 50대 초반에 하고 나면 갈 곳이 대체로 마땅치 않다”며 “오랜 경험과 노하우, 콘텐츠를 가지고 있는데도 사장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런 경륜을 살릴 수 있는 장이 많아진다는 게 언론 발전을 위해서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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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이모작, 눈높이 낮추는 게 관건


인생 제2장은 무엇으로 써 내려가야 할까.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기자들에게도 은퇴 후 ‘노후 설계’는 먼 나라 얘기 같으면서도 어깨를 짓누르는 가장 부담스러운 짐이다. 하지만 왕도는 없다.


주어진 환경이나 관심사가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인생 이모작 설계가 쉽지 않다는 방증이다. 그렇다고 정치권에 ‘눈도장’을 찍히는 일도 보통 정성이 아니면 어려운 얘기다.


특히 은퇴 이후의 인생 설계가 쉽지 않은 이유는 예열 없이 눈앞에 닥쳤을 때 비로소 고민하기 때문이다.

실제 언론진흥재단에서 지난달 22일 발표한 ‘퇴직 언론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조사 대상 600명 중 22.5%만 언론사를 그만두기 전에 퇴직 이후를 준비한 것으로 나타났다.


퇴직 이후를 위해 준비한 구체적인 내용으로는 ‘대인관계·네트워크 형성’이 45.9%로 가장 많았고 이어 ‘대학원 진학’(34.8%), ‘외국어 습득’(17.0%), ‘자격증 취득’(13.3%), ‘귀농 및 창업준비’(6.7%) 등의 순이었다.


▲‘2015 퇴직언론인 실태조사’ 자료


반면 퇴직 언론인들이 선호하는 일자리는 ‘언론분야 자문위원’(16.2%), ‘저술·집필·문필 활동’(15.5%), ‘학생(청소년) 지도’(14.8%), ‘교수직·대학강의’(8.8%), ‘홍보·기획 전문가’(8.2%), ‘시니어 기자단’(5.8%) 등으로 집계됐다.


이처럼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게 현역시절 경험 등을 바탕으로 강단에 서는 것이다. 최근엔 재능기부 형태로 교육 현장에 설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면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특히 지방자치단체가 제공하는 평생교육원 프로그램엔 사진이나 글쓰기 관련 과목이 많기 때문에 관심만 갖는다면 얼마든지 보람찬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전직 언론인들의 공통적인 의견이다.


또 언론진흥재단에선 올해부터 퇴직 후 5년 이내 전직 언론인 대상으로 대학에서 강의를 할 수 있도록 5명을 선정(작년 11월 선정), 1인당 매월 150만원(연간 8개월)을 지원하고 있다.


관심 갖던 분야를 은퇴 후 실천하는 전직 언론인들의 사례도 눈여겨 볼만 하다. 조용철 전 중앙선데이 영상에디터는 불우 청소년들에게 장학금 지원 사업을 하는 ‘한무리나눔장학회’ 대표를 맡으면서도 틈틈이 백화점 문화센터 등에서 사진 관련 강의를 하고 있다.


이호준 전 서울신문 국장도 지난해 은퇴 후 여행 작가이자 시인으로 외부 강연과 저술활동, 외부 기고 등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관건은 현역 시절에 가졌던 기대치와 현실의 장벽 사이에서 눈높이를 어떻게 맞추느냐다.
조용철 전 에디터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찾는 게 가장 중요하다”며 “은퇴 전 자신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는다면 기회는 생각보다 많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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