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면 삼키고 쓰면 뱉고…나이든 게 죄인가요?

[임금피크제의 그림자]
노사 합의 과정에서 잇단 잡음
시니어·주니어 세대간 갈등도
신규채용 없고 임금삭감 골몰
시니어 제역할 부여 고민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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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놓고 그만두라는 얘기 아니고 뭐겠어요”. 한 일간지 26년차 편집기자 A씨의 말이다. 지난해 섹션 부서에 발령받고 새로운 일에 적응해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자신감을 얻었다는 그는, 올해 임금피크제를 시행하겠다는 회사의 통보에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고 한다. 정년 60살 연장에 따른 임금피크제로 언론사들이 고연차들의 임금을 삭감하며 당장 수입이 줄기 시작했기 때문. 대학교를 다니고 있는 아들과 딸을 생각하면 올해 등록금부터 어떻게 메울지 벌써부터 부담이 몰려온다. A 기자는 “올해는 그렇다쳐도 내년엔 절반가량이 깎일 예정이라 더 걱정”이라며 “말이 좋아 임금피크제에 정년연장이지, 결국 임금절감을 위한 구조조정이 아니겠나”라고 하소연했다.


정치부와 경제부를 오가며 지금의 회사와 23년째 연을 맺어온 B기자도 서운함을 토로한다. B기자는 “어제의 정든 후배들이 갑자기 남처럼 멀게 느껴지는 게 가장 안타깝다”며 “그동안 회사를 힘들게 키워놨더니 후배들이 마치 쓸모없는 고물처럼 대하는 것 같아 자괴감이 든다”고 했다. 그는 예정보다 일찍 회사를 떠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정든 회사에서 정년퇴직하는 희망을 안고 이 자리까지 왔지만, 눈치가 보여서 더 있을 수 없단 판단에서다. B기자는 “대학원 진학이나 사업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자금이 있는 경우엔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라며 “모아놓은 돈이 별로 없을 경우엔 바로 생계 전선에 무작정 뛰어드는 격”이라고 호소했다.


▲언론사들이 60세 정년 연장에 따라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면서 내부 잡음이 계속되고 있다. 사진은 임금피크제와 관련한 경향신문과 서울신문, 조선일보 노보.


언론사 임금피크제 후폭풍
최근 언론사들이 일정 연령 이후 임금을 낮추는 제도인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며 내부 잡음이 끊이질 않고 있다. 올해부터 정부가 공기업과 공공기관, 상시근로자 300인 이상 사업장을 대상으로 ‘정년 60세 연장법’을 시행하며, 해당 언론사들이 임금피크제 카드를 꺼내놓자 정년을 앞둔 기자들이 반발에 나선 것. 현재 지상파 3사와 동아일보, 서울신문, 연합뉴스 등 8개 언론사는 합의를 했거나 이미 시행 중이고, 경향신문과 조선일보, 중앙일보는 노사가 본격적인 논의에 들어간 상태다.


합의가 된 매체는 임금삭감 폭이 커 후폭풍이 일고 있고, 노사가 완전히 다른 안을 내놓아 합의점을 찾기 어려운 언론사는 내부 분열로 이어지고 있다. 경향신문의 한 기자는 “감액률도 중요하지만 똑같은 강도의 업무를 요구하느냐 안하느냐의 여부가 더 중요하다”며 “매일경제와 SBS의 경우 평균임금 자체도 높을 뿐만 아니라, 안식년 보장 등 해당 기간 동안 신분을 유지하고 일을 덜 시키는 구조기 때문에 이전과 똑같은 근무강도를 요구하는 경향과 비교해 가혹한 건 아니다”고 말했다.


임금피크제를 둘러싼 논란은 세대 간의 대립으로 이어진다. 지난 20일 CBS는 노사가 내놓은 합의안을 두고 시니어 기자들과 주니어 기자들은 첨예한 갈등을 빚었다. 감액률 최대 50%(유급 안식년 제외)의 ‘다운사이징 임금피크제’를 두고 고연차 기자들이 “기존안에서 대폭 수정된 구조조정안”이라며 거세게 항의한 것. 2014년 12월 CBS의 임금피크제 관련 합의안은 다운사이징 임금피크제의 감액률이 10%이고, 평가제도와 인센티브제도를 함께 추진하기로 돼 있다. 하지만 2015년 합의안은 2014년의 합의안과 다르게 감액률이 크게 늘었고, 인센티브제도도 명시되지 않았다.


CBS의 한 고참 기자는 “어린 기자들과 감정의 골이 쌓이다보니 내부 시니어 기자들끼리 노조를 따로 결성하자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고 전했다. 결국 CBS는 시행을 유보하고 임금제도개선에 대한 재협상에 나서기로 합의했다. CBS의 5년차 기자는 “현재 부장 연봉은 1억원 정도로, 일선에서 고생하는 후배들의 연봉의 3배다. 향후 10년간 퇴직금만 250억원 이상이 드는 등 이대로 놔두면 회사는 재정난에 허덕일 게 뻔하다”며 “그동안 수혜를 받아온 선배들이 양보를 하지 않아 일선에서 일할 수 있는 젊은 기자들은 줄어드는 등 악순환이 거듭되고 있다”고 말했다.


만55세부터 임금이 절반으로 삭감되는 안에 합의한 서울신문도 도입 초반부터 삐거덕거리고 있다. 노사가 “정년연장 시행으로 향후 5년간 누적 인건비 부담이 210억원대에 달하는 냉엄한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며 임금피크제를 합의한 데 대해 시니어 기자들이 반발하고 있는 것. 한 조합원은 “회사의 미래와 후배들을 진정으로 원한다면 반대만 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회사에서 앉아서 거의 놀다시피하는 선배들을 보면 반발심이 안들겠나”라고 반문했다. 반면 고참 기자는 “사내 눈치를 보느라 적극적으로 불만을 표하는 사람들은 없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삭감안인 건 분명하다”고 했다.

누구를 위한 임금피크제인가
일부 기자들은 언론사에 임금피크제를 적용하는 것 자체가 맞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다른 산업에 비해 임금수준이 낮기 때문에 은퇴 후 제2의 인생을 꾸리는 데 임금피크제가 큰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 서울신문의 한 고참 기자는 “늘어난 정년만큼 회사에 남아있고 싶지만 눈치를 준다면 어쩔 수 없을 것 같다”며 “정년 후의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 연금생활을 할 생각”이라고 전했다. 실제로 한국언론진흥재단이 22일 발표한 ‘2015 퇴직 언론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퇴직 이후를 미리 준비했다’고 답한 응답자는 22.5%. 퇴직 언론인 5명 중 1명만 퇴직하기에 앞서 ‘은퇴 설계’를 준비한 것으로 나타났다. 현역 시절 은퇴 준비를 제대로 못한 채 정년을 맞이하기 때문에 생계를 위협받을 우려가 크다.


정부가 임금피크제로 인한 손해를 최소화하고자 내놓은 방안도 별다른 효과가 없다는 지적이다. 정부는 ‘고용보험법 시행령 개정안’을 통해 300명 이상 사업장에서 55세 이상 근로자를 대상으로 피크임금 대피 10% 이상 감액할 경우 해당 근로자에게 연간 최대 1080만원까지 지원하도록 하고 있다. 또 근로자 퇴직급여보장법 시행령 개정안을 시행해 퇴직금 중간 정산을 신청할 수 있도록 했다. 한 일간지의 기자는 “정부 지원금은 3년간 한시적으로 운영되고 퇴직금 중간정산은 대부분의 언론사들이 연봉제를 도입하면서 퇴직금을 중간 정산해 실효성이 떨어지는 정책”이라고 꼬집었다.


기자들은 “신규채용과 정년보장,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서 임금피크제를 실시한 건데 본질이 흐려지고 있는 것 같다”고 입을 모은다.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 정년연장과 함께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건데 사측이 이를 임금절감의 수단으로만 악용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한겨레의 한 기자는 “사측이 임금 부담을 줄이겠다고 하는데 그럼 그에 따른 신입 채용 계획안을 같이 가져와야 하는 것 아니냐”며 “처음에 사측이 제안하긴 했지만 현재는 논의조차 중단된 상황”이라고 했다. 서울신문의 한 기자도 “조직의 허리가 취약한 상태에서 인력충원 계획도 없이 임금피크제가 도입된 건 찜찜할 뿐”이라고 전했다.


특히 시니어기자들에게 어떤 역할을 배분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단 비판도 나온다. 도입 시기와 감액률에만 매달리다보니 고연차 기자들을 위한 재교육 프로그램 등에 대해 노사 모두 손 놓고 있는 상황. 최근 언론사들이 디지털 중심 조직개편을 추진하고 있는 만큼 시니어기자들의 역할 배분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 중앙일보의 한 고참 기자는 “주니어와 사측은 시니어에 역할을 주고, 시니어는 새로운 업무에 대한 이해와 노력이 필요하다”며 “임금절감에만 혈안이 돼있을 게 아니라 회사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서라도 임금피크제에 대한 다양한 논의와 분석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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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직자 임피제 제외 논란…간부 길들이기 우려도

보직자에 한해 임금피크제를 제외하는 규정도 논란거리다. 이미 직급수당을 추가로 받고 있는 보직자들에게 ‘이중 혜택’을 주는 건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지적이다. 반면 일부 기자들은 “편집국장 등 보직간부의 경우 똑같은 업무강도로 일하면서 임금피크제를 적용받을 순 없지 않느냐”며 맞서고 있다.


현재 이 같은 방안을 합의했거나 논의 중인 언론사는 연합뉴스와 한국경제, MBC 등 이다.
한경은 올해부터 일반 직원·평기자의 경우 만 56세부터 임금피크제를 적용한다. 하지만 직책이 있으면 일정금액의 보전 수당을 받을 수 있다. 부국장·국장의 경우 이미 정년이 각각 만 57세, 만 58세였던 점을 고려해 해당 나이까지 임금피크제 적용을 유예하기로 합의했다. 또 임금피크제 대상자가 부국장·국장으로 승진하면 임금을 깎지 않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다. 보직이 없더라도 팀장급이나 논설위원, 전문기자 등 ‘회사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고 판단되면 지급률을 조정하는 등 노사 간 논의를 진행하겠다는 입장이다.


연합뉴스 노사도 지난 19일 실·국·본부장 등 보직자를 임금피크제 대상에서 제외하는 데 합의했다. 사측 관계자는 “실국본부장 대상자가 워낙에 소수여서 논란이 크게 제기되지는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선을 그었다. 연합뉴스 한 기자는 “애초에 부장급 이상의 정년은 만 58세인데다 임금피크제 시행에 따른 감액도 만 58세부터 이뤄져 큰 반발은 없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연합뉴스의 한 시니어 기자는 “실국본부장을 상대로 말 잘 듣게 하려는 ‘길들이기’ 수단이 아니겠냐”고 우려했다.


MBC도 보직자 제외 조항을 두고 거센 반발을 하는 모습이다. 사측이 내놓은 임금피크제안은 미보직 직원에 한해서만 기본급의 30%를 깎는 게 주요 골자다. 반면 임금피크제 대상에서 제외된 보직자는 수십만 원의 직급수당뿐 아니라 업무추진비나 조직관리비 명목으로 법인카드를 추가로 지급받는다. 약 수천만원에 달하는 연봉을 그대로 받으며 정년을 보내게 되는 것. 사측은 “보직자가 적정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며 도입 이유를 설명했지만, 노조는 비보직자와의 임금격차가 더 커질 수밖에 없는 점을 지적했다.


또 보직자 혜택 조항이 ‘회유책’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MBC의 노조 조합원은 “특정 부서장을 맡은 직책부장이 되면 노조에서 탈퇴해야 한다”며 “직책부장은 경영진이 임명하는 자리여서 경영진 말을 잘 들을 수밖에 없다. 결국 노조와 조합원들을 압박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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