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카메라를 손에 쥐었다, 그래서 행복했다

[기자 25시](24·끝) 권주훈 뉴시스 사진영상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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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년 기자생활…국회만 40년 취재
경향·한국·동아 거쳐 뉴시스서 은퇴
사진 찍는 걸 좋아하다 기자 입문

격동의 현대사 카메라 앵글에 포착
문익환 목사·박용길 장로 포옹장면
심수봉·신재순 법정행 기억에 남아

47년이나 했으면 많이 했어
은퇴가 아니라 언론사를 떠나는 것
난 계속 사진기자, 변하는 건 없어


카메라를 들고 격동의 현장을 누비고 다닌 대(大)기자가 언론사를 떠난다. 47년 만이다. 반세기 가까운 사진기자 생활 동안 국회에서만 꼬박 40년을 보냈다. ‘현역 최고참, 만년 사진기자’ 권주훈 기자(뉴시스 사진영상부 편집위원)는 사진으로 대한민국 현대사를 오롯이 기록해 왔다. 이달 말 은퇴를 앞둔 그를 17~18일 국회에서 만났다.

▲권주훈 기자(뉴시스 사진영상부 편집위원)가 국회 사진기자실 자신의 자리에 앉아 포즈를 취하고 있다. 권 기자는 40년간 국회에 출입하며 이 곳을 지켰다.

17일 오전 국회 본관 2층. 노트북이나 카메라를 든 기자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로비에서 오른쪽으로 새누리당 원내행정국을 끼고 돌아 원내대표실, 공보실을 거쳐 229·230호 사진기자실에 다다랐다.


백발의 권 기자는 사진기자실 앞까지 나와 맞아줬다. 기자실 테이블 위엔 큼지막한 렌즈를 단 카메라 여러 대가 놓여 있었다. 그는 “사진기자실은 국회가 생긴 뒤 한 번도 장소를 옮기지 않았다”고 했다.


1959년 기자가 된 그는 1976년 3월부터 국회에 출입해 40년간 여기서 일했다. 권 기자에 대해 이상학 연합뉴스 사진부 기자는 “역사의 산 증인이다. 단순히 경력이 길다, 오래됐다가 아니라 관록이 있는 분이다. 아버지처럼 모셨던 선배”라고 전했다.


권 기자는 이야기를 시작하자마자 “기사에 나이는 밝히지 말아달라”고 웃으며 말했다. 그 이후에도 “연차를 보면 대충 짐작할 텐데 굳이 나이를 쓸 필요가 있느냐”면서 수차례 언급했다.(그는 1969년 대학을 졸업했다)


▲지난 18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이만섭 전 국회의장의 영결식에서 카메라를 들고 취재하는 권 기자.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경향신문에 입사했다. 처음엔 기자가 되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단지 사진이 좋았을 뿐이다. “경제학을 공부했는데 전공보다 사진 찍는 걸 더 좋아했어요. 명동에 있는 사진학원에 몇 달 다녔는데 전업 작가가 될 만큼 배우진 못했지요. 그래서 택한 게 기자예요(웃음). 사진 기술이나 마음가짐은 기자가 된 후 선배들에게 배웠죠.”


그는 사진기자란 “하늘과 바다, 언제 어디서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활동적인 사람이어야 한다”면서 “높고 낮은 사람 모두 한 마음으로 만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72년 한국일보로 이직한 그는 역사적 순간을 여러 차례 맞닥뜨리게 된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유고를 알리는 문공부 장관의 칠판 브리핑, 10·26사태가 벌어진 궁정동 만찬장에 참석했던 심수봉과 신재순이 법정으로 가는 뒷모습, 1979년 문익환 목사가 안양교도소에서 출소한 뒤 아내 박용길 장로와 포옹하는 장면, 전국에서 일어난 시위…. 모두 그의 카메라 앵글 속에 담긴 장면이다.


▲정부 대변인 김성진 문공부 장관이 10·26사태와 관련한 임시국무회의 결과 내용인 “박정희 대통령 유고로 최규하 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하며 비상계엄을 선포키로 했다”는 글을 기자실 흑판에 쓰고 있다.(1979년 10월27일)

1986년 한국기자상을 수상한 ‘서울대 이봉수군 분신사진’도 그의 대표작 중 하나다. “수배중이던 문익환 목사가 서울대에서 강연 한대서 찾아갔어요. 갑자기 학생들 시선이 한쪽으로 쏠리길래 그걸 따라 카메라를 들었는데 이봉수군이 화염에 휩싸여 떨어지고 있었죠. 정신없이 셔터를 눌렀어요.”


이 사진은 외신에 먼저 나가 해외언론에서 대서특필됐다. 한국일보는 사건 당일엔 보도하지 못하다가 2~3일 뒤에서야 사진을 실었다. “데스크가 검열단과 합의를 한 모양이에요. 이런 짓은 너무 과격하니까 하지 말라는 사진설명이 붙은 채 나갔죠.”


그는 휴대폰 사진첩에 담긴 사진을 하나하나 소개했다. 얼마 전 펴낸 책 ‘렌즈로 쓴 혼돈과 격동의 역사’에 실린 것들이다. 책에는 대한민국 역사의 순간을 담은 사진 200여점을 모았다. 11월30일~12월1일 국회에서 동명의 사진전을 열기도 했다. 그는 흑백 사진에 담긴, 수십 년 전 사건들을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묘사했다. 날짜도 정확했다. 조근조근하던 그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한국일보에 이어 1998년 동아일보, 2006년 뉴시스로 자리를 옮겼다. 그 사이 필름카메라가 디지털로, 흑백사진이 컬러로 바뀌었지만 그는 늘 카메라를 손에 쥐고 역사의 현장에 서 있었다.


혼란스러운 역사 앞에서만 셔터를 눌렀던 것은 아니다. 국회 주변의 자연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국회의 사계절, 눈, 비, 새, 나무, 꽃을 사진에 담았다. 2010년엔 그동안 찍은 생태사진 200여점을 국회에 기증하고 사진전을 개최했다. “지금의 국회 어린이집 근처는 꾀꼬리가 새끼를 치던 곳인데…. 예전보다 환경이 파괴돼서 아쉽죠.”


국회 본관과 국회도서관, 의원회관을 연결하는 지하통로와 국회도서관 4층 벽면에는 그의 생태사진 수십 점이 걸려 있다. 국회 곳곳을 함께 걸으며 자신의 사진을 설명하는 발걸음은 유난히도 빨랐다.


▲문익환 목사가 안양교도소에서 출소한 뒤 수유리 자신의 집 앞에서 아내 박용길 장로와 포옹하고 있다.(1979년 12월8일)

가장 좋아하는 사진은 국회도서관 4층 정치행정 조사심의관실과 조사행정실장실 사이 벽면에 걸린 까투리다. “어느날 아침에 출근하는데 까투리가 새끼 5마리를 데리고 윤중로를 걷고 있더라고요. 원래 사람이 오면 도망가야 하는데 몸을 숨길 데도 없었나 봐요. 까투리가 도심 한복판에 오는 건 흔치 않은 일이죠.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입니다.”


그의 외장메모리에는 사진 수천수만 장이 인물, 상황, 장소, 날짜별로 꼼꼼하게 정리돼 있었다. 그중 눈에 띄는 것은 독도였다. 독도 폴더를 보면 일몰, 일출, 항공, 야생화, 별, 구름, 만물상으로 더 자세히 나뉘어 있다. 1990년 한국일보 재직시절 한국수중과학회 수중영상분야 회원으로 독도 수중생태계를 촬영한 것이 인연이 됐다.


지난 25년간 독도를 100여차례 찾아 바닷속과 주변 환경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거북이 닮은 독도에 있는 삼형제굴, 악어바위, 코끼리바위, 탕건봉을 설명하는 내내 그의 입가엔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독도엔 눈이 쌓이기 힘들어요. 바람이 워낙 거세 눈이 내리자마자 날아가 버리니까. 5·6월이 날도 좋고 사진이 가장 예쁘게 나오긴 하는데, 저는 특히 독도의 야경을 좋아합니다.” 그의 휴대폰 배경화면은 검푸른 하늘에서 별이 쏟아질 것 같은 독도 야경사진이었다.


가족사진도 여러 장 보였다. 아내의 생일, 딸의 결혼식, 가족 여행, 손자의 모습. 아들은 아버지를 따라 기자가 됐다. 현재 MBC 촬영기자로 권 기자처럼 국회를 출입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이 벌어진 궁정동 만찬장에 참석했던 심수봉씨와 신재순씨가 육군본부계엄 보통군법회의 소법정에 증인으로 참석하고 있다.(1979년 12월15일)

19일 오전엔 이만섭 전 국회의장의 국회장 영결식 취재에 나섰다. 그는 ‘뉴시스 권주훈 기자’라는 이름이 적힌 니콘 카메라를 매고 있었다. 촬영에 앞서 김형오 전 국회의장 등 오랜만에 만난 이들과 인사를 나눴다. 그는 먼저 “올해까지만 하고 그만 둔다”고 말을 꺼냈다. 사람들은 “더 하셔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그는 “47년이나 했으면 많이 했다. 집에서 손자나 봐야겠다”고 답하며 멋쩍게 웃었다.


영결식이 시작되자 이곳저곳 자리를 잡으며 셔터를 눌렀다. 한 장소에서 5~6컷 찍고는 사진을 확인했다. “필름카메라 세대라 한 장소에서 많이 찍지 않아요. 좋은 앵글에선 셔터를 많이 누르지 않아도 좋은 사진이 나오죠.”


취재를 마치고 국회 본관 지하 1층에 있는 배드민턴 연습장을 보여주겠다는 그를 따라갔다. 텅 빈 강당이었지만 이곳에 네트를 치고 퇴근 후 매일 저녁 1~2시간씩 배드민턴을 친단다. 그는 “기자, 공무원, 정당 직원들, 청소하는 분들까지 모두 모여 운동한다”며 “여기 내 사물함도 있다”고 말했다.


그가 운동을 시작한 것은 10년 전 파키슨병을 앓게 된 후부터다. 근육이 천천히 굳어가는 파킨슨병 증상을 완화하기 위해 선택한 운동이 배드민턴이었다. 덕분에 아직도 일상에서 불편함은 없다. “일을 쉬지 않았고 운동도 꾸준히 한 덕에 몸이 괜찮은 것 같아요. 안 좋은 생각할 때 가끔 손이 떨리곤 하는데 일 할 때는 절대 문제없어요.”


그에게 현직을 떠나는 기분을 물었다. “아쉽다. 답답한 마음도 든다”고 입을 열었다. “후배들이 워낙 잘하니까 일은 마음이 놓이는데, 문제는 배드민턴입니다(웃음). 국회 밖에서 이만한 곳을 찾아보니 없더라고요. 이 나이에 낯선 사람들과 운동을 시작하는 것도 어려울 것 같고. 아마 내년에도 국회로 배드민턴 치러 와야 할 것 같아요. 이제 출입증을 반납해야 하니까 일반인처럼 매일 방문증을 끊어야겠지요.” 그의 목에 걸린 국회 출입증 유효기간은 2017년 5월29일로 적혀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휴대폰 앱 ‘국회식단’으로 메뉴를 확인하더니 “오늘은 보쌈정식”이라며 작은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식당 앞에서 줄 서 있는 순간에도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다. 40년 전 국회에 첫 발을 내딛던 그날처럼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국회를 나서면서 이제 은퇴 뒤에 뵙겠다고 말하자 그 다운 대답이 돌아왔다. “은퇴했다고 사진기자가 현장을 구경만 하겠어요? 보이는 대로 찍지. 은퇴가 아니라 언론사를 떠나는 것뿐이에요. 계속 사진기자고. 변하는 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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