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의 초반 흥행을 주도하는 인물은 무소속 상원의원으로 사회주의자임을 표방하는 버니 샌더스(73)와 부동산 갑부로 리얼리티 쇼 프로그램을 진행한 도널드 트럼프(69)다. 샌더스는 대선 풍향계라고 하는 아이오와주의 민주당 지지자를 상대로 한 여론조사에서 30%의 지지율을 얻어 클린턴(37%)을 바짝 추격 중이다. 트럼프는 벌써 몇주 째 각종 조사에서 공화당 1위를 달리고 있다. 이들의 돌풍은 공히 이름 뒤에 ‘현상’이라는 말이 따라올 정도로 미국인들에게도 놀라운 일이다.
샌더스는 유세를 하는 곳마다 구름 관중을 몰고 다녀서 화제가 되고 있다. 그의 연설은 화려하지 않고, 달변도 아니다. 하지만 유권자들은 그가 말과 행동이 일치한다며 좋아한다. 미국 정치의 고질병인 돈 선거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소액 기부금에만 의존해 선거 운동을 하고 있다. 소수의 부자들이 지배하는 나라가 아니라 노동자, 서민이 주인 되는 미국을 만들겠다고 한다.
샌더스는 부자 증세, 거대 금융기관 해체 등으로 대학등록금 무상화, 보편적 복지, 최저임금 인상 등 북유럽식 모델을 미국에 적용하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있다. 사회민주주의가 낯선 미국 정치에서 그는 ‘급진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워싱턴포스트의 한 기자는 “개인적으로 샌더스의 주장이 전혀 과격하지 않다고 보지만, 미국 현실에서 그는 급진적 정치인”이라고 말했다. 민주당에 입당한 적이 없는 샌더스에 대한 민주당원들의 지지가 높다는 것은 클린턴으로 대표되는 민주당 주류가 지지자들의 열망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트럼프가 정치권에 주는 충격은 이보다 더 크다. 트럼프는 샌더스와 달리 직업정치인이 아니다. 그는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가치에 구애받지 않는 문제 발언으로 늘 언론을 장식한다. 여성 앵커를 ‘매력적이지만 머리가 텅 비었다’는 의미의 속어로 칭하는가 하면, 멕시코 이민자들을 ‘강간범’로 비난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한국에 대해서도 ‘돈을 많이 벌어가면서도 언제나 도와달라고 손내미는 나라’라고 공격했다.
여기저기서 ‘미쳤다’는 비난이 나오지만 그럴수록 그의 인기는 더 올라간다. 트럼프 지지층이 백인들 중 가난한 계층 사람들이라는 사실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미국의 ‘주인’인 백인들이 박탈감을 느끼던 차에 트럼프가 자신들의 의사를 대변한다고 느낀다. 트럼프가 극우적 발언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복지수당 증가를 얘기하기도 하고, 이라크에 대한 부시, 오바마의 정책을 싸잡아 비판한다. 그는 극우라기보다 워싱턴 정치에 신물 난 미국인들에게 통쾌함을 선사하는 엔터테이너에 가깝다.
샌더스와 트럼프 현상을 묶어서 본 이유는 양당구도가 고착된 미국 정치에서 제 3정당에 대한 열망이 근래 들어 가장 강하게 드러난 사례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그 열망이 1992년 무소속으로 나온 로스 페로가 18.9%를 득표한 이래 최고에 이르렀다고 보고 있다.
미국에서 제 3정당이 성공하지 못한 가장 큰 요인은 돈이다. 자금 동원력에서 그 어떤 후발주자도 민주, 공화 양당에 맞설 수 없다. 다만 트럼프는 그 자신의 돈이 아주 많고, 샌더스는 수많은 소액기부자들의 돈에 의존하기 때문에 그나마 버티고 있을 뿐이다. 두 거대정당이 직면한 이 ‘현상’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수용하느냐에 따라 대선의 향배뿐만 아니라 미국 정치의 앞날이 결정될 것이다.
손제민 경향신문 워싱턴특파원의 전체기사 보기Copyright @2004 한국기자협회.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