째깍거리는 인종차별 시한폭탄

[글로벌 리포트 | 미국] 손제민 경향신문 워싱턴특파원

▲손제민 경향신문 워싱턴특파원

백인 경찰 네 명이 흑인 남성을 에워싼 채 손으로 몸을 샅샅이 훑고 있었다. 두 팔을 머리 뒤로 올린 이 남성의 바지춤은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았다. 이 모습을 바로 앞에 앉아 바라보는 흑인 노인은 늘 있는 일이라는 듯 무심한 표정이다. 지나가던 흑인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지켜보기 시작했다. 휴대폰을 꺼내 촬영하는 사람도 있었다. 경찰은 이따금 주변을 힐끗거리며 몸 수색을 이어갔다. 이 흑인은 그 자리에서 풀려났다. 몸에서 마약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찰은 별다른 얘기 없이 주변을 경계하며 사라졌다.


한인이 운영하는 인근 주류 소매점. 10살도 되어보이지 않는 한 흑인 소년이 뭉칫돈을 들고와 계산대 앞에서 1달러 화폐로 모두 바꿔달라고 했다. 주인이 방탄유리 너머로 “부모님과 같이 오면 바꿔줄게”라고 하자 소년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쳐나간다. 주인은 마약거래와 관련된 돈을 세탁하려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 소매점 앞에서 불과 며칠 전 흑인들 사이에 총격 보복 사건이 벌어졌다고 했다. 그는 “경찰이 시신을 수습해가고 우리 가게에 들러 범행 장면이 녹화된 CCTV를 떠서 갔지만 경찰이 범인을 체포할 것이라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 사건이 나면 1주일 동안은 아무도 밖에 나오지 않아 장사가 안된다”고 말했다.


흑인 청년 프레디 그레이가 경찰 연행 과정에서 척추가 손상돼 사망한 지 3개월이 흐른 8일 낮 볼티모어 북서부 펜노스 전철역 주변 풍경이다. 소요사태로 불탄 CVS(편의점) 약국은 여전히 검게 그을린 채 모든 출입구가 합판에 덮여있어 당시 상황을 증언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일상을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시한폭탄이 언제 다시 터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팽배해 있었다. CVS에서 길 건너편에 있는 이노크프랫 도서관의 매니저 멜라니 딕스는 “마릴린 모스비 검사가 그레이 사망에 관여한 경찰 6명 모두 살인죄로 기소하며 당장 분노는 가라앉았지만, 10월 재판에서 이들이 풀려나기라도 하면 이 도시가 다시 어디로 갈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마침 이 날은 앤서니 배츠 볼티모어 경찰서장이 사임한 날이었다. 흑인인 배츠는 소요사태 발생 초기 수세적으로 대응했다는 이유로 볼티모어 경찰노조의 비판을 받아왔다. 지도부가 상황을 오판하지 않고 초기에 소요사태를 진압했다면 경찰관들의 부상이나 무고한 자영업자들의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가 물러난 더 큰 요인은 올 들어 볼티모어에서 155건의 살인사건이 일어나며 최근 몇 년 새 최다 건수를 기록하면서다. 그 중 절반은 프레디 그레이 사건 이후 일어난 것이다.


뉴욕, 시카고 등과 더불어 미국 내에서 거칠기로 유명한 볼티모어 경찰은 강한 법집행에 대한 요구와 인종차별적 법집행에 대한 반발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사실 이 어려운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나와 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4월 말 백악관 기자회견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옆에 세워둔 채 볼티모어 소요사태에 대해 장황하게 얘기하며 “더러운 일을 경찰에만 맡겨둘 수는 없다”고 했다. 극심한 가난 속에서 태어나고 아버지가 없는 경우가 허다하며, 아버지가 있다 하더라도 마약 문제로 감방에 드나들기 일쑤여서 결국 아이들도 대학보다는 감방에 갈 확률이 높고, 주요 고용창출 산업은 마약 거래가 될 수밖에 없는 이 커뮤니티들의 문제를 경찰 혼자 해결할 수는 없다는 얘기다.


이런 고민을 미국 대통령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는 사실은 미국인들 입장에서 그나마 다행이다. 그것은 오바마가 흑인 빈민가에서 커뮤니티 운동을 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바마의 기여는 거기까지인 것 같다. 그가 집권한 이후 미국 사회에서 인종과 관련한 각종 문제들이 가장 많이 터져나오고 갈수록 심해지기 때문이다.


미국에 일시적으로 체류하는 기자의 입장에서 이 문제의 본질은 단순한 인종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미국 거의 모든 도시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문제가 비록 인종적 경계선을 따라 극명히 드러나기는 하지만 그 심연에는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 그리고 가정, 교회, 지역커뮤니티 등 미국사회의 전통적 공동체의 붕괴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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