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과학기자들 한국에서 과학저널리즘 지평 넓혀

아시아 첫 개최…1200명 참가
노벨상·퓰리처상 수상자 강연
메르스·에볼라 세션 시종 열기
네팔 지진 참상 브리핑 큰 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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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태원 국민일보 기자

“서울 대회가 큰 성공을 거둬 우리에게는 부담이지만 또한 좋은 자극이 될 것이다”
지난 11일 코엑스 오디토리엄에서 열린 세계과학기자대회(WCSJ 2015) 폐막식에서 세계과학기자연맹 신임 회장에 선임된 미국의 커티스 브레이너드는 인사말을 통해 이런 요지의 소감을 밝혔다. 이날 폐회식에서는 미국의 샌프란시스코가 덴마크의 코펜하겐과 경합 끝에 차기 대회 개최지로 선정돼 커티스 브레이너드의 이같은 발언은 서울 대회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함축하고 있다고 봐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지난 8일부터 12일까지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제9회 세계과학기자대회는 공식적인 참가 등록자만 53개국 1200명을 넘어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규모가 큰 기자 행사라는 외형적 기록 뿐 아니라 기조강연과 세션 등 콘텐츠에서도 수많은 찬사를 받은 행사였다. 


야마나까 신야 박사와 팀 헌트 경 등 2명의 노벨상 수상자와 데보라 블럼, 덴 페이긴 등 3명의 퓰리처상 수상자가 기조강연과 프레너리 세션을 진행했는가 하면, 한국의 메르스 사태를 조명한 ‘메르스 세션’과, 세계를 공포에 떨게 한 ‘에볼라 세션’을 편성해 국내외 언론의 뜨거운 관심을 모았다. 이번 행사에는 기조강연과 워크숍, 플레너리세션 각 3개와 대중 강연 2개, 동시세션 40개 등으로 구성됐다.


이번 대회 준비와 진행을 총괄한 심재억 조직위원장(한국과학기자협회 회장·서울신문 부국장)은 “WCSJ 2015는 세계과학기자연맹(WFSJ) 발족 이후 아시아에서 처음 열리는 대회라는 점에서 안팎의 기대가 컸고, 그런만큼 당연히 부담도 컸다”면서 “2년 전 핀란드 헬싱키에서 유수의 나라들과 유치 경쟁을 벌일 때 제시한 슬로건인 ‘Expanding Our Horizens’의 취지를 잊지 않고 세계과학기자대회의 새로운 틀을 성공적으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결과에 크게 만족한다”고 말했다.

명강연, 세계의 이목을 끌다
9일 진행된 야마나까 신야 박사의 기조강연은 그의 명성에 걸맞게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코엑스 오디토리엄 메인홀을 가득 메운 청중들은 기초의학 연구에 입문한 동기부터 그에게 노벨상의 영광을 안겨준 유도만능 줄기세포에 대한 최근의 연구 동향까지 낱낱이 소개하며 진행된 그의 강연에 숨소리도 내지 않고 빠져들었다. 과학저널리스트들은 물론 국내외 의학자와 과학도 등 수많은 청중들은 그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며 그의 업적을 기렸다.


▲지난 9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 오디토리움에서 열린 2015 세계과학기자대회 개회식에서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영국 런던시티대 언론학 교수로, 과학저널리즘의 세계적 권위자인 코니 세인트루이스도 열정의 강연으로 청중들을 매료시켰다. 강연 후 그에게 인사를 건네자 “항상 그렇지만 나의 강연은 청중이 만든다”면서 “이런 진지한 분위기에서 강연을 하는 것은 정말 재미있고, 기분 좋은 일”이라며 엄지를 곧추세웠다. 오랜 기자생활을 거쳐 뉴욕대에 몸담은 덴 페이긴은 과학저널리즘이 살아남는 법을 주제로 명불허전의 강연을 선보였다.


데보라 블럼의 강연은 ‘퓰리처는 아무에게나 수상의 영광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어찌 보면 오만하기까지 한 퓰리처상의 권위를 확인시키기에 충분했다. 운명적으로 논픽션의 세계에 몸담은 과학저널리스트는 물론 과학자와 과학도들에게 각인시킨 그가 제시한 탐사보도의 중요성은 이번 대회를 관통한 화두이기도 했다.


또 한 명 빠뜨릴 수 없는 참가자는 노벨상을 수상해 영국 왕실로부터 작위까지 받은 팀 헌트 경. 대회 기간 중 여성을 비하하는 발언으로 물의를 빚은 그는 그러나 불미스러운 논란에도 불구하고 서울을 떠날 때까지 거인의 풍모를 잃지 않았고, 항상 웃는 얼굴로 주변의 분위기를 바꿔놓곤 했다.

세션들, 언론의 본질을 일깨우다
월요일의 ‘워크숍 데이’에 이어 이번 대회의 성가를 높인 첫 세션은 화요일 개막식 직전에 열린 메르스 세션이었다. 사실, 대회 개회 전부터 일거에 우리나라를 공황상태로 몰아넣은 메르스 사태는 조직위원회의 막바지 행보를 가로 막는 거대한 암초였다. 몇 번의 난상토론 끝에 조직위가 내린 결정은 ‘메르스 세션’을 긴급 편성하는 역발상 정공법이었다. 이 어려운 과제를 떠안은 조동찬 SBS 의학전문기자는 불과 일주일만에 세계 언론의 지대한 관심을 끈 세션을 훌륭하게 이끌어 메르스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불안을 해소하는 것은 물론 장·단기적인 정책 대안까지 제시하며 대회 성공의 서막을 열었다.


▲지난 9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 그랜드볼룸에서 열린 2015 세계과학기자대회 메르스 특별세션에서 참가자들이 연사의 발표를 경청하고 있다.

마틴 엔서링크의 에볼라 세션도 단연 화제의 중심에 자리했다. 사이언스지 소속으로, 조직위 프로그램위원회에도 참여한 마틴은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에볼라의 진앙이었던 시에라리온에서 처음 에볼라 사태를 보도해 국제적 관심을 유인한 우마루 포파나 기자를 초청해 ‘정확하고, 빠르고, 용기 있는 보도’가 재앙 수준의 대규모 감염질환 사태를 수습하는데 있어 어떻게 기여하는 지를 가장 극명하게 설명해 감동을 주었다. 에볼라 사태를 파헤치기 위해 스스로 아프리카 위험지역으로 뛰어든 마틴의 값진 경험이 과학저널리스트 모두에게 큰 울림으로 각인된 세션이기도 했다.


미디어 브리핑을 통해 생생하게 전해진 네팔의 지진과 관련한 현지 기자 체험담도 청중들의 심금을 울렸다. 이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네팔의 크하트라 카르키 기자는 네팔 지진의 참상을 전하며, “여러분들이 ‘신의 땅’이라고 부르는 네팔에서는 지금,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참상이 빚어지고 있다”면서 “비록 과학으로 지진을 막을 수는 없지만, 언제나 그랬듯 여러분 모두가 뜨거운 인류애로 자연재해와 맞닥뜨린 네팔을 껴안아 달라”고 호소해 강연장을 숙연하게 했다.

과학저널리즘의 새로운 길찾기
대회 첫 날의 하이라이트 격인 ‘에디터와의 만남’은 과학저널리스트와 과학자, 과학도들이 세계 주요 매체의 에디터들을 통해 글로벌 스탠더드에 부합하는 연구와 주제 선정 및 글쓰기 등을 직접 체험하도록 한 워크숍으로, 개막 전부터 관심을 끈 프로그램답게 행사장이 청중으로 가득 차 시종 진지하고 뜨거운 분위기였다. 


▲지난 9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 오디토리움에서 열린 2015 세계과학기자대회 개회식에서 심재억 한국과학기자협회 회장이 참석자들에게 환영사를 전하고 있다.

사이언스지의 마틴 엔서링크와 리트랙션 와치 설립자인 이반 오란스키, 파이낸셜 타임즈의 앤드류 잭, 월스트리트저널의 론 윈슬로, 뉴욕타임즈의 앤드류 랩킨, 네이처지 로지 메스텔 등이 참석한 워크숍에 참석한 국내의 한 대학생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대박! 내가 저렇게 쟁쟁한 과학저널리스트들을 만나 조언을 듣고, 궁금한 것에 대한 답까지 듣다니…”라고 썼다. 과학자들도 “사이언스나 네이쳐, 뉴욕타임즈, 월스트리트저널에 기사가 실리는 것도 결국은 사람의 일이어서 그들과의 네트워킹과 소통이 왜 중요한 지를 알 수 있었다. 흡족하다”고 기뻐했다.


데이터 저널리즘을 다룬 플레너리와 워크샵도 많은 저널리스트들의 관심을 끌었다. 피터 버미즈가 프로듀싱한 사이언스 저널리즘 관련 세션도 당초 15명을 토론에 참여시키기로 했으나 지원자가 폭주해 50명이나 참여시키는 등 대단한 관심을 끌었다.

‘한국을 주목하라’ 당당한 외침
심재억 조직위원장은 이번 행사의 의의 중 하나로 ‘아시아의 존재감 부각’을 들었다. 그는 “지금까지 세계과학기자대회는 유럽과 북미가 중심이었고, 그들이 과학저널리즘의 주류였다”면서 “그러나 이제는 아시아, 특히 한국과 일본, 중국을 경유하지 않는 ‘세계’의 논의가 무의미하지 않나. 그래서 그들에게 아시아를 보라고 말해 왔고, 이번 대회를 통해 충분하고 효과적으로 그런 발언을 했다”고 평가했다.


심재억 조직위원장은 이어 “이제 국내 언론도 바뀌어야 한다. 언제까지 ‘우리는 우리 식으로’라는 구닥다리 언론관에 묶여있을 것인가. 언제까지 외신에만 의존해 그들의 시각으로 생산한 기사를 비판없이 복제만 할 것인가”라며 “그런 점에서도 이번 서울 과학기자대회는 우리 과학기자들에게 세계의 흐름과 관점, 방식과 지향을 알게 했으며, 해외 과학기자들에게는 ‘한국도 있다’, ‘아시아를 주목하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계기가 됐다”고 덧붙였다.

<민태원 국민일보 기자·세계과학기자대회 조직위원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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