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위안부 협상에서 잊어선 안 될 것

[스페셜리스트 | 외교·통일] 김동진 세계일보 국제부 차장

▲김동진 세계일보 국제부 차장

정치만 생물이 아니다. 외교도 생물이다. 죽은 듯 정지된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새 살아 꿈틀거린다. 지난주 한·일 관계는 그런 기대감이 번지기에 충분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2일 워싱턴포스트 인터뷰에서 한·일 양국 간 위안부 협의와 관련 “상당한 진전이 있었으며 협상의 마지막 단계(final stage)에 이르렀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그동안 위안부 문제에 신중에 신중을 거듭했던 박 대통령의 행보에 비춰볼 때 매우 이례적인 언급이다.


일본 측 반응은 아직은 냉랭하다. 일본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지난 15일 정례브리핑에서 “(박 대통령 발언의) 취지가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언급을 피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위안부 문제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됐다는 일본의 기존 입장을 강조했다. 외무성 주변에선 “구체적인 진전이 없는데 뭘 보고 진전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는 목소리도 들려온다. 


하지만 일본 측의 부인에도 외교가에선 이미 한·일간 진전된 협상 내용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와 관련, 이명박 정부 시절의 한·일간 비밀협상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이 전 대통령은 지난 2월 출간한 자신의 회고록에서 “(2012년에) 위안부 문제 해결이 9부 능선을 넘었다”고 밝혔다. 


일본 정부는 그해 3월 사사에 겐이치로 외무차관을 서울로 보내 위안부 협상을 시도했다. 일본 총리가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사과 편지를 쓰고, 주한일본대사가 이를 전달하며, 일본 정부 예산으로 인도적 차원의 금전을 지급한다는 것이 일본 측 제안의 골자였다. 일명 ‘사사에안’으로 불리는 이 협상안은 그해 8월 이 전 대통령의 독도 방문과 11월 일본 노다 정권의 붕괴 등으로 정세가 급변하면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이명박 정부는 이 같은 사실을 한국 언론에 철저히 숨겼고 일본 측도 2013년 가을 아사히신문의 단독 보도가 나오기 전까진 함구로 일관했다. 협상 당시 관방 부장관이던 사이토 쓰요시는 아사히 인터뷰에서 “막바지 협의를 하는 사이에 총리가 중의원 해산을 선언했고, 한국도 완전히 대선 국면에 돌입했다”며 “좀 더 시간만 있었다면 합의 할 수 있었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전문가들은 박근혜 정부의 위안부 협상도 이 사사에안을 토대로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런 관측이 맞다면 우리 정부가 결코 간과해선 안 될 문제가 있다. 일본 정부는 가해자로 위안부 협상에 참석하는 것이지만 우리 정부는 피해자들의 대리인으로 참여한다는 점이다. 일본 정부는 협상에서 이뤄진 최종 결정에 책임을 질 수 있지만 우리 정부는 그렇지 않다. 일본 정부의 사과나 배상 제안을 받아들이고 말고는 우리 정부가 아니라 위안부 피해자들만이 결정할 수 있다.


이와 관련, 아시아여성기금의 사례는 좋은 반면교사다. 일본은 1995년 이 여성기금을 설립해 일부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총리의 사죄 편지와 함께 민간모금으로 조성된 위로금을 지급했으며, 의료복지 지원도 시행했다. ‘사사에안’과 유사한 방식이다. 하지만 위안부 피해자들은 이 방안이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성을 피해가면서 민간 차원에서 해결하려 한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따라서 피해자들에게 먼저 설명하고 이해를 얻기 전에 함부로 타결 임박을 운운해선 안된다. 이 문제는 이제 50명 밖에 남지 않은 위안부 할머니들이 일본 측 조치와 우리 측 대응을 가슴으로 받아들일 때만 끝날 수 있다. 혹여 양국 정부 인사들이 “한·일 안보협력이 중요하다”며 어설픈 결론을 냈다가는 피해자들에게 또 한번 깊은 상처만 남기게 될 것임을 잊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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