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기훈의 무죄선고, 그 쓸쓸함에 대하여

[특별기고] 김의겸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김의겸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유서대필’ 사건의 강기훈씨가 24년 만에 대법원의 재심을 통해 무죄를 확정받은 것과 관련해 기자협회보는 사건 당시 그를 취재한 김의겸 한겨레신문 논설위원의 글을 싣는다. <편집자주>


‘유서대필 조작사건’ 강기훈과의 인연은 꼭 24년 전 시작됐다. 1991년 5월18일이다. 그날 시위 도중 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진 강경대의 장례식이 있었다. 장례 행렬을 취재하고 있는데, 삐삐가 요란하게 울렸다. 캡이었다. “무조건 강기훈을 찾아내서 신문사로 데리고 들어와.” 다행히 강기훈은 장례 인파 속에 있었다.


그의 손목을 잡아끌고 회사로 갔다. 캡은 다짜고짜 투신 자살한 김기설의 유서를 내보이며 써보라고 했고, 강기훈은 얼결에 써보였다. 그때만 해도 우린 사태의 엄중함을 깨닫지 못했다. 철없이 “야, 그러고 보니 필체가 비슷하네”라는 농담도 던졌으니 말이다.


난 그 뒤 강기훈 담당기자가 됐다. 하지만 좌절의 연속이었다. 김기설의 필체를 찾아다니고 증인을 만나보려고 했다. 한번은 김기설의 여자 친구 홍아무개씨를 찾아 성남 시내를 누빈 적도 있다. 홍씨는 당시 사건의 향방을 결정짓는 중요한 증인이었는데, 검찰이 홍씨를 빼돌려 성남의 어느 가정집에 숨겨두고 있다는 제보를 받은 것이다.


어렵게 집을 찾아 문을 열고 들어서려는 순간 갑자기 건장한 체격의 형사가 나타나 나를 가로막았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주변에 강간 사건이 발생했는데 경찰서까지 같이 가야겠다”며 강제로 연행해가는 거다. 손목을 뿌리치고 도망도 쳐봤으나 역부족이었다. 그날 저녁 검찰은 자신들이 홍씨의 신변을 보호 중이었다고 인정했지만, 홍씨는 이미 다른 곳으로 옮긴 뒤였다. 그때 취재기를 ‘기자협회보’에 썼던 기억이 있다.


이제 무죄가 확정됐으니 기쁜 마음으로 글을 써야 하나 그저 씁쓸하기만 하다. 24년이란 세월은 강기훈의 몸과 마음을 망가뜨렸다. 그는 지금 간암으로 고통스러운 투병생활을 하고 있다. 하얀 얼굴에 훤칠한 키였는데, 거무튀튀한 낯빛에 구부정하다. 눈은 퀭하니 꺼졌고, 눈 밑 그림자는 짙다. 억울함과 분노로 얻은 병이다. 마음도 아프다.


▲강기훈 쾌유와 명예회복을 위한 시민모임 회원들이 지난 14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유서대필 사건 강기훈 씨 무죄 확정판결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시스

24년을 기다려온 판결인데도 그는 14일 대법원 법정에 나타나지 않았다. 사건을 되새기며 아픈 기억을 떠올리기가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다. 나도 옛 기억을 떠올리며 그 법정엘 가봤다. 24년이란 세월에 비하면 판결은 너무나 간단했다. “사건번호 2014도2946 피고인 강기훈, 검사 상고를 기각한다.” 그게 다였다. 강기훈의 지인들은 조용히 법정을 빠져나와 손을 맞잡으면서도 “저 한마디 듣자고 24년을 기다렸단 말인가”라며 허탈해했다.


그 뒤 이른 점심자리가 이어졌는데, 막걸리 잔이 빠르게 돌아갔다. 강기훈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술잔이 오가는데 기어코 울음이 터지고야 말았다. 강기훈의 여동생이었다. “오빠가 건강해지기만 한다면…내 가진 모든 걸 내놓겠어요. 오빠~” 모두들 숙연해졌다.


쓸쓸함은 피폐해진 강기훈 때문만은 아니다.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지 않고 있다. 검찰도 법원도 그리고 언론도 사과 한마디 없다. 아니 “궁극적 진실은 강씨 본인이 아는 것이다”라고 사설을 쓰는 언론도 있다. 강기훈은 무죄가 확정되고 나흘만에 자신의 심경을 털어놨다. “이제 역사적 판단과 책임이 필요한 때가 됐다. 진정한 용기는 잘못을 고백하는 것”이라고. 한 사람이라도 이 말에 귀기울여 용기를 낸다면, 이 헛헛함이 가라앉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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