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당한 아이들 몫까지 찍을 겁니다"

세월호 기록하는 이승구 4·16 기록단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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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구 4·16기록단 PD가 지난 10일 서울 광화문광장 세월호 농성장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의 기자회견을 촬영하고 있다.


7개월간 진도 체류하며 실종자 가족과 함께 지내
유족 동의 받고 촬영 시작…아직도 기록할 것 많아


세월호가 침몰한 다음날 새벽,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내 조카가 세월호 안에 있다. 언론이 새빨간 거짓말을 하고 있다.” 친구는 분을 삭이지 못했다. 그러면서 “너는 독립PD니까 진실을 애기할 거라 믿는다. 취재해 달라”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선뜻 세월호를 취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미 엄청나게 많은 언론이 현장에 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며칠 후 진도에서 촬영을 하고 있던 박봉남PD(4·16기록단 단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세월호 기록을 같이 하면 어떻겠냐는 전화였다. 그는 카메라를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이승구 PD는 세월호 참사를 자발적으로 기록하는 독립다큐멘터리PD들의 모임 ‘4·16기록단’에 합류했다. 


그가 기록단에 들어간 후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안산이었다. 유가족대책위를 만나 세월호를 기록하겠다고 양해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아마 유일하게 가족대책위에게 허락을 받아서 찍은 팀일 거예요. 언론은 그냥 찍어갔으니까요.” 진도에서도 양해를 구하는 작업은 계속됐다. “5월 말 진도로 내려가 그곳에서 7개월을 실종자 가족들과 함께했어요. 진도체육관에서 같이 먹고 자며 식구가 됐는데 그렇게 친해질 수 있었던 건 처음부터 카메라를 들이대지 않았기 때문이죠. 어느 날 한 어머니가 그러시더라고요. PD가 와서 찍지도 않고 뭐하냐고. 촬영 동의를 얻은 후부터는 정말 인정사정 보지 않고 찍었어요. 철저하게 기록하자고 생각했죠.”


가족들의 배려 속에 그는 제3자가 아닌 가족기록팀처럼 세월호의 모든 면을 기록했다. 언론이 통제된 바지선에 유일하게 올라 촬영을 했고, 범대책 본부 브리핑 등도 모두 찍었다. 가족들이 있는 곳에 그의 카메라가 항상 함께했다. 


사실 그는 재난지역만 10년 넘게 찍은 베테랑이다. 그러다보니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잘 알고 있다. “재난을 겪은 사람을 피사체가 아니라 인격체로 생각해야 해요. 카메라에 담아내야 할 사람에게 최대한 예의를 지켜야 하죠. 그래서 외국에서는 재난 현장에 취재 경험이 굉장히 많은 분들을 보냅니다.”


그런 그의 눈에 한국 언론의 취재 행태는 안타깝기만 하다. “세월호 참사 현장에는 신입 기자들이 많았죠. 그들은 어마어마한 참사를 취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트라우마를 느낄 수 있었을 거예요. 그 와중에 격해져 있는 유가족을 인터뷰한다는 건 굉장히 두려운 일이었을 거고요. 게다가 취재 경쟁이 붙다보니 유가족들도 카메라라는 또 하나의 폭력에 시달리게 됐죠.” 


그는 그래서 일부러 방송용 카메라보다 훨씬 작은 카메라를 들고 다녔다. 유가족들에게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덕분에 그의 그림은 자연스럽다. 가족들이 스스럼없이 카메라를 보며 말한다. 


그가 보는 언론은 어떨까. 그는 사고 초기 언론 보도에 문제가 많았다고 지적했다. “전원구조 오보 때문에 구조도 늦어졌고 절망도 더 커졌습니다. 진도체육관에 체육복 300벌이 있는 걸 본 적이 있어요. 단원고에서 물에 젖은 아이들에게 주려고 사온 체육복이었죠. 창고에 비닐봉지 가득 쌓여 있는 체육복을 보는데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 많은 체육복들이 주인을 찾지 못한 데에는 언론의 책임도 분명 있었죠. 그때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희생당한 아이들의 몫까지 열심히 기록해야겠다고.”


어느덧 그의 기록은 1년을 향해 가고 있다. 원래 목표에 다다른 것이다. “아직도 기록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아요. 아무래도 1년을 더 연장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질긴 놈이 이긴다는 말 있잖아요? 끝까지 해볼 겁니다.” 그의 기록은 오늘도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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