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먼저 만난 뒤 모스크바 가라

[글로벌 리포트 | 중국] 박일근 한국일보 베이징특파원

▲박일근 한국일보 베이징특파원

남북 지도자가 오는 5월 러시아에서 만날 지가 국제적인 관심사가 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승전 70주년 기념식에 박근혜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을 모두 초청한 러시아는 일찌감치 김 제1위원장은 꼭 참석할 것이라며 분위기를 띄우고 있다. 아직 박 대통령의 참석 여부는 결정되지 않았지만 오랫동안 교착 상태인 남북 관계의 개선을 바라는 많은 사람들은 박 대통령이 이번 기회를 잘 살리기를 고대하고 있다. 


미국이 우방국의 ‘모스크바행’을 반대한다지만 미국의 가치와 우리의 국익이 항상 일치할 순 없다. 박 대통령의 임기가 벌써 2년이나 지난 만큼 올해마저 남북 관계의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할 경우 임기 내내 결국 아무런 성과도 내기 힘들 것이란 우려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남북의 정상이 만나는데 굳이 다른 나라가 필요한 지에 대해서는 자꾸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된다. 모스크바는 너무 멀다. 서울에서 평양까진 250㎞ 밖에 안 된다. 이처럼 가까운 곳에 살고 있는 서울과 평양의 지도자가 각각 6600㎞, 6300㎞ 이상 떨어진 곳까지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만나야 한다는 건 납득이 잘 안 간다. 담장 너머 얘기해도 될 이웃이 이를 외면한 채 이역만리까지 가 만나는 꼴이다. 


더군다나 한민족인 남북의 정상이 남의 잔칫집에서 첫 상견례를 하는 것은 여러모로 어색하고 체면도 안 서는 일이다. 잔칫집에 온 다른 손님들은 “바로 옆집에 살면서 여기에서 처음 보는 거야? 너희는 원래 한집이었잖아”라고 꼬집을 것이다. 잔칫집 주인은 따로 있는 만큼 남북은 그저 들러리 손님으로 전락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박 대통령은 모스크바에 가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박 대통령은 2013년 10월 스스로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제창한 이다. 한동안 냉전 등으로 단절됐던 유라시아를 ‘소통 개방 창조 융합’의 공간으로 되살려 하나의 대륙, 창조의 대륙, 평화의 대륙으로 만들어 가자는 게 그 골자인 것으로 알고 있다.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실현하는 데 가장 협력을 구해야 할 나라가 러시아다. 러시아는 유라시아 대륙의 심장일 뿐 아니라 면적상으로도 유라시아 대륙의 3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러시아의 초청에 응하고 러시아와의 협력을 강화하는 것은 그동안 공허한 구호에 그쳤던 박 대통령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구상을 실현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유라시아 이니셔티브가 아니더라도 우리나라와 러시아는 협력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연해주가 대표적인 예다. 러시아의 연해주 인구가 200여만명에 불과한 데 비해 연해주와 접한 중국 동북 지역에는 무려 1억3000여만명이 살고 있다. 러시아가 긴장할 수밖에 없다. 지금은 중국과 러시아가 찰떡 궁합처럼 보이지만 두 나라는 역사적으로 서로를 경계해 왔다. 중국보단 우리나라나 북한과 협력해 연해주를 개발하고 싶은 게 러시아의 본심이다. 


이에 따라 박 대통령은 국익을 위해선 모스크바로 가야 한다는 게 외교 전문가들 조언이다. 그러나 김 제1위원장을 모스크바에서 처음 만나는 것은 앞에서도 지적했듯 명분도 약하고 모양도 안 나는 일이다. 


이런 모든 곤혹스런 상황들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있다. 바로 남북이 먼저 만나는 것이다. 남북 정상 회담을 가진 뒤 그 다음 모스크바로 간다면 명분과 실리를 모두 챙길 수 있다. 남북 모두 모스크바로 가, 두번째 정상 회담을 하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의 손으로 결정해야 한다. 남북의 정상은 남의 나라 땅이 아닌 한반도에서 만나는 게 맞다. 러시아는 우리에게 중요한 나라다. 박 대통령은 자신이 한 말에 책임져야 한다. 이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답은 남북이 먼저 만난 뒤 모스크바로 가는 것이다. 


만약 김 제1위원장이 모스크바로 가지 않는다고 해도 박 대통령으로선 시간을 버는 셈이 된다. 중국이 9월 베이징(北京)에서 열릴 항일전쟁 및 반(反)파시스트 전쟁 승리 70주년 기념 열병식에 남북을 모두 초청할 것이 유력하기 때문이다. 올해 박 대통령에겐 두 번의 기회가 온다. 늦어도 9월 전엔 남북 정상 회담이 이뤄지길 기대해 본다.



박일근 한국일보 베이징특파원의 전체기사 보기

배너

많이 읽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