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퐁니·퐁넛' 잊지 말아야 할 기억입니다"

'1968년 2월12일' 펴낸 고경태 한겨레 토요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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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태 한겨레 토요판 에디터

2000년 6월27일. 고엽제 후유의증 전우회 소속 2000여명이 한겨레신문사를 습격했다. 이들은 참전군인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유리창을 깨고 난동을 부렸다. 이들이 분노한 이유는 1999년 9월부터 한겨레21이 보도한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에 관한 기사 때문이었다. 당시 한겨레21은 베트남 중부 5개성의 한국군 학살 피해자 르포를 시작으로 관련 기사들을 보도하고 있었다.


군인들의 무용담 수준으로만 전해졌던 이야기는 1990년대 베트남 정치국의 조사를 계기로 본격적인 문제제기가 되고 있는 상태였다. 한국군의 방화, 살해 기록은 조사 자료만으로도 기사가 됐지만 고경태 기자를 포함한 취재팀은 추가적인 취재를 통해 베트남 피해자들의 육성을 그대로 전했다. 이 기사로 한국 사회는 큰 충격을 받았다. 외세에 의해 침략만 당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던 자긍심은 우리도 다른 나라에 몹쓸 짓을 했다는 역사의 기록 아래 힘을 잃었다. 


당시 고경태 기자는 한겨레21의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보도 전담 취재팀이었다. 그는 구수정 호찌민 통신원, 황상철 기자와 함께 1999년 9월부터 2000년 9월까지 1년 동안 매주 한 페이지씩 관련 기사를 썼다. 특히 그는 ‘퐁니·퐁넛 사건’에 주목했다. 베트남전에서 일어난 수많은 학살 중 유일하게 기록의 그물에 많이 걸려 있는 사건이 퐁니·퐁넛이었기 때문이다. 2000년과 2001년에 걸쳐 그는 퐁니·퐁넛 사건과 관련해 중앙정보부 수사와 미군 비밀문서, 주검사진 주인공 이야기 등을 보도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한참 뒤인 2012년, 잊고 지냈던 퐁니·퐁넛이 그의 머리에 다시 떠올랐다. 여전히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에 관한 보도는 제자리걸음이었다. 그는 다시 베트남으로 갔다. 사실 퐁니·퐁넛 사건은 그의 머리에서 지워질 수 없는 특수성이 있었다. 74명의 죽음과 이들 중 5살도 채 되지 않은 아이와 60살이 넘은 노인이 있었다는 것. 부녀자의 젖가슴을 도려내 죽이는 등 살해 수법의 잔인함. 고 기자는 전쟁이 가진 악랄함을 느끼는 동시에 해결되지 못한 무엇인가를 정리하고 넘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결국 그 사건에 가장 많이 접근한 것은 나였죠. 나라도 기록해야겠다는 의무감을 갖고 책을 쓰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최근 ‘1968년 2월12일’을 펴냈다. 퐁니·퐁넛 사건이 가진 무게감이 워낙 컸지만 그래도 재미있게 작업하고자 했다. 하나의 마을을 무대로 그 안에 존재하는 경험과 기억을 모조리 살리고 싶었다. 수십 명 피해자들의 개별적인 기억, 미군과 남베트남의 기록들까지. 퐁니·퐁넛 사건이 일어났던 1968년 2월12일, 그 하루의 재연을 위해 그는 퐁니·퐁넛 마을에 한 달 정도 머무를 각오까지 했다. 그러나 책은 퐁니·퐁넛에서 시작해 1968년의 격렬한 한국 사회를 기록하는 쪽으로 확장됐다. “서사로서의 완성도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어요. 사건의 실질적 배경과 맥락을 넓히는 작업을 하고 싶었죠. 1968년 12월9일 울진·삼척에 침투한 북한 특수부대원들이 9살 이승복 군의 입을 찢어 죽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모두가 기억하고 있죠. 그러나 1968년 2월12일 퐁니·퐁넛에 진입한 한국군 해병대원들이 6살 응우옌득쯔엉 군의 입에 총을 쏘아 죽인 사건은 잘 모릅니다. 자격을 얻지 못하고 따돌림 당한 기억이죠. 나라도 나서서 특별하게 기억해주고 싶었어요.”


그럼에도 만족에는 끝이 없다. 좀 더 많은 증언을 듣고 풍부한 취재를 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고 기자는 아쉬워했다. “성취도 있지만 그만큼의 한계도 있는 법이죠. 아직도 한국 사회에는 상반된 분위기가 존재합니다. 단적인 예로 아직도 베트남전 참전 군인들은 전적지 투어를 가고 다른 한편에서는 시민단체 등이 같은 곳으로 참회의 여행을 떠나죠. 이 논쟁은 앞으로도 끝나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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