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들이 부럽냐구요? 그냥 좋은 기자로 남고 싶어요"

[기자 25시](19)이충헌 KBS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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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1 경쟁률 뚫고 들어왔더니 의사가 왜 기자를? 불편한 시선
황당한 리포트 지시에 사표 던지기도, 3년만 버티자던 게 10년 훌쩍 넘겨
기자생활, 환자 진료보다 보람 있어, 올바른 건강지식 필터 역할하고 싶어 


정보가 홍수를 이루는 시대. 국민의 기본 관심사인 건강정보 또한 매일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지만, 상업적 지식이 범람하는 통에 정확한 정보를 손에 넣기란 쉽지 않다. 의료계 전문가이자 언론인으로서 균형추 역할을 하는 의학전문기자들의 역할은 그래서 중요하다. 청진기와 가운을 벗고 마이크 혹은 펜을 든 순간, 그들에겐 환자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보다 더 큰 책임감과 사명감이 주어졌는지도 모른다. 정신과 전문의 출신으로 방송계 최초의 의학전문기자로 일하고 있는 이충헌 KBS 기자는 진료실에서 환자를 보던 시절보다 지금 훨씬 보람을 느낀다. 매일 아침 ‘라디오 주치의’가 되어 청취자들을 만나고, 국민에게 도움이 되는 의학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이충헌 기자의 일상을 지난달 30일 따라가 봤다.



‘라디오 주치의’로 매일 청취자와 소통
여의도 KBS 본관 4층 생방송 라디오센터.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그의 아침은 라디오 스튜디오에서 시작된다. 2008년 KBS1라디오에서 첫 방송을 시작한 ‘라디오 주치의 이충헌입니다’가 만으로 6년, 햇수로 7년째를 맞았다. 오전 9시, 최광희 영화평론가와 ‘시네마 클리닉’ 코너 녹음을 간단히 마친 뒤 10시10분 시작될 생방송 준비에 들어갔다. KBS 1라디오는 광고가 없고 방송 특성상 음악을 틀수도 없기 때문에 정확한 시각에 시작하고 끝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10시10분15초, 시그널뮤직이 흘러나오고 곧이어 ‘온에어’에 불이 들어온다. 오늘은 박태환 선수의 도핑 사건을 통해 남성 호르몬 보충 요법의 효과와 부작용, 주의사항을 살피고, 세종대왕의 건강법과 함께 세종이 성병을 앓았다는 소문의 진상을 알아봤다. 해당 주제별 담당 의사와 전화로 인터뷰하면서 대본에 없는 질문을 던지거나 필요한 답변을 유도하며 능수능란하게 진행을 한다. 그 역시 전문가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출연하는 교수들이 겁내기도 해요. 제대로 설명을 안 하면 제가 막 몰아치거든요. 도움이 안 되는 정보는 아까운 전파 낭비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요.”


▲이충헌 KBS 의학전문기자가 지난달 30일 강북삼성병원에서 취재를 마친 뒤 마무리멘트 촬영을 하고 있다.

‘라디오 주치의’는 다양한 건강관련 정보를 청취자들에게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는 프로그램이다. 이 기자는 “검증된 정보”와 “대중적”이라는데 무게를 둔다. “올바른 의학지식을 친절하고 알기 쉽게 전달하는 것도 아주 중요한 역할이거든요.” 그가 ‘라디오 주치의’에 갖는 애정은 각별하다. 생방송 중에도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청취자 반응을 확인하며 소통하는 것이 큰 즐거움이다. 다만 방송 시간 관계상 젊은 사람들이 많이 듣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크다. “그래서 팟캐스트를 활성화 하려고 하는데 팟빵 순위가 400위에요. 100위까지 올려보자는데 협조를 안 해주네요.(웃음) 지금은 디지털 퍼스트가 아닌 모바일 퍼스트 시대인데 말이죠.”


45분짜리 생방송을 마치고 스튜디오를 빠른 걸음으로 빠져 나오면서 그가 작게 투덜거린다. 오늘은 머뭇거릴 여유가 없다. 바로 신관 앞 주차장으로 건너와 준비된 취재차량에 올랐다. ‘저소득층일수록 당뇨환자가 많다’는 연구와 관련된 취재를 위해 강북삼성병원을 찾는 길이다. 당뇨 전문의와 관련 사례자(환자)를 인터뷰해야 한다. 이미 준비는 다 되어 있다. 병원에서 의사는 물론 이 기자가 요청한 조건에 맞는 사례자 섭외까지 마쳐놨기 때문이다. 이 기자는 “병원을 취재할 때 사례자 섭외 여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어차피 대학병원이니까, 의사가 누구냐 보다는 사례자 섭외를 잘 해주는 곳을 선호하죠. 홍보실의 역할이 중요해요.”


오전 11시25분, 병원에 도착하니 홍보 담당자가 마중을 나와 있다. 섭외된 사례자의 간단한 정보 등을 확인하며 2층으로 올라갔다. 진료가 끝나길 기다렸다 내분비내과 박철영 교수의 진료실로 들어섰다. 카메라와 마이크를 세팅하는 사이, 이 기자는 박 교수 앞에 자리를 잡고 몇 가지 질문을 던진다. 박 교수는 이 기자의 질문에 따라 “저소득층일수록 비만이 많아 당뇨도 많다”고 진단하거나 “교육이 중요한데, 저소득층은 시간이 없어서 보건소에서 무료 교육을 제공해도 소용이 없다”며 ‘건강도시락’을 대안으로 제안하기도 했다. 이 기자는 의사가 사용하는 영어나 의학용어를 쉬운 단어로 바꿔가며 자연스럽게 ‘방송용 인터뷰’를 유도해낸다.


목표대로 5분 만에 인터뷰 완료. 다음은 사례자 차례다. 보건소에서 무료 진료를 받다 이 병원으로 옮긴 70세 남성 당뇨 환자가 주인공이다. “얼굴이 나와도 될까요?” 간단히 인사를 나눈 이 기자가 먼저 묻는다. “안 될 게 뭐 있어. 내가 무슨 범죄자도 아니고.” 화통한 성격의 사례자 덕분에 인터뷰도 수월하게 마쳤다. 그리고 바로 1층 로비로 내려와 스탠딩 화면을 따는 것으로 이날 취재 일정은 종료. 회사로 돌아가 취재한 내용을 정리하고 영상을 편집하는 일만 남았다. 보도 계획은 아직 잡히지 않았다. “의학뉴스는 시제가 없어서 밀리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주로 기획 아이템을 많이 준비하는 편이죠.”


취재를 마치고 함께 한 점심식사 자리에서 담배가 화제에 올랐다. 이 기자도 올 1월1일부로 완전히 금연을 했단다. “지금까지 10번 끊어봤어요. 전에는 끊고 나서도 술 마시면 폈는데, 이젠 술 마셔도 담배 생각이 안 나요. 완벽하게 끊은 것 같아요.”


이 기자는 ‘몸짱’ 기자로도 유명하다. 한때 체중이 90킬로까지 나갔던 그가 몸짱 기자로 변신하게 된 계기는 뱃살과 건강 때문이었다. 의학전문기자로서 국민의 건강을 위한 정보를 전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건강은 지키지 못했다. 심부정맥혈전증과 폐색전증이라는 치명적인 질환을 앓고 있는 그는 실제로 7~8년 전 한번 쓰러진 경험도 있다. 


거의 매일 술을 마시며 건강 챙기기는 뒷전이었던 그는 2009년 독하게 마음을 먹고 운동을 시작했다. 밥도 안 먹고 아침 점심 저녁으로 하루 5시간씩 운동만 했다. 그러다 트레이너의 권유로 책(체중계는 잊어라 이제 라인이다)도 내고 2013년엔 남성들이 멋진 근육과 지덕체를 뽐내는 ‘쿨가이대회’에 최고령자(당시 46세)로 참가해 본선까지 올랐다. 그는 “내 인생에 제일 잘한 선택이 운동”이라며 “삶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말한다.

16년 의료인 길 버리고 의학전문기자로
사실 그의 삶에서 가장 큰 ‘반전’은 12년 전에 일어났다. 의대를 졸업하고 대학병원 교수가 되는 걸 당연하게만 생각했던 그가 돌연 ‘기자’라는 낯선 세계로 들어선 것이다. 


연세대 의대 6년, 공중보건의 3년4개월, 인턴 1년, 레지던트 4년, 그리고 펠로(임상강사) 2년까지. 의대에 진학한 순간부터 16년 동안 그는 의사였다. 교수가 되는 일만 남았고, 될 수 없다고 의심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펠로로 2년 동안 교수 밑에 있었어요. 교수가 될 차례였죠. TO(정원)가 났는데, 교수가 그 자릴 다른 사람에게 줘버린 거예요. 교수는 ‘1년만 참으면 내년에 신경 써주겠다’고 했지만 배신감이 컸죠.”


다른 길은 생각도 해보지 않았던 그였기에 교수 자리에서 미끄러진 좌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런데 운명이었을까. 우연히 KBS에서 의학전문기자를 뽑는다는 공고를 봤다. ‘1호’라서 더 눈에 들어왔는지 모른다. “원래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성격이거든요. 원서를 냈죠. 1명 뽑는데 20명이 왔더군요. 20대1이라니 욕심나더라고요. ‘일단 되고 나서 결정하자’ 했죠.”


의학전문기자로 들어왔지만, 다른 수습들과 마찬가지로 ‘하리꼬미(잠복근무)’, ‘사스마리(경찰기자)’ 생활을 꼬박 6개월간 했다. 여자 동기는 무려 띠동갑, 남자 동기는 7~8년 아래였다. “저는 알콜, 도박, 마약 중독 전문의였거든요. 그런데 와서 보니 감기에 대한 리포트도 해야 하는 거예요. 회의감이 컸죠.” 그렇게 좌충우돌 1년을 보냈다. 병원에서 ‘이충헌 선생님’으로 불리던 그는 한참 어린 ‘선배’들의 반말에도 익숙해져야 했다. 


그런 건 차라리 사소한 문제였다. ‘1호 의학전문기자’를 바라보는 KBS 내부의 시선이 그를 더 괴롭혔다. “처음엔 저를 안 받아줬어요. 의사가 왜 기자를 해? 이름 알려서 개원하려고? 심지어 의료계 프락치 아니냐는 소리까지 들었어요. 신뢰를 보내지도 않고, 일도 고되고, 나는 전문가인데 의견이 반영되는 것 같지도 않았죠. 의사지만 언론계에선 신참이었으니까요.”


결국 조류독감과 관련해 담당 부장의 황당한 리포트 지시에 반발하다 1년 만에 사표를 던졌다. 선배들의 만류로 닷새 동안 휴가를 다녀오는 것으로 일단락 됐지만, ‘부장에게 대든 기자’로 찍혀 평생 먹을 욕을 그때 다 먹었다. 그러다 2년차 들어 “좋은 팀장을 만나면서” 그럭저럭 지낼만해졌고, 3년만 버티자던 것이 어느새 10년을 훌쩍 넘겼다. “지금은 잘 한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적성에 안 맞았으면 10년 넘게 있을 수 없었겠죠.” 


▲이충헌 기자가 강북삼성병원 당뇨센터에서 저소득층 70세 당뇨 환자를 인터뷰하고 있다.

그는 기자 생활이 앉아서 환자 진료를 보는 것보다 보람된다고 말했다. “한 사람을 고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영향을 미치잖아요. 시청률 1%만 해도 40만 명이 보는 거예요. 어디 연설이나 강의를 가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숫자죠. 그리고 보통 의사들은 환자에게 말을 잘 안 해주잖아요. 그래서 청취자 분들이 좋아하는 것 같아요. 의사보다 더 신뢰 있게 받아들이기도 하고요.”


의료행위가 이윤추구의 수단으로 변질되고, 건강정보의 탈을 쓴 상업적 지식이 범람하는 시대. 이 기자는 의학전문기자의 역할을 ‘필터’로 규정한다. “검증되지 않은 상업적 지식들 가운데 올바른 건강지식을 위한 필터 역할을 하는 게 제 일이죠.”


그는 어떤 사안을 보도할 때 의사로서 보는 시각과 기자로서 보는 시각의 균형 감각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의학전문기자들이 ‘섹시한 기사’ 유혹에 빠질 수가 있거든요. 국민에게 미치는 해악이 크다면 절대 해서는 안 됩니다. ‘선동하지 않는 것’ 역시 의학전문기자의 역할이죠. 특히 감염병의 경우 더 신중해야 합니다. 반대로 의사로서 너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 기사 가치를 판단하는 것도 좋지 않아요. 공익적인 관점에서 판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1세대 방송 의학전문기자로서, 그는 후배들에게 어떤 롤모델이 되고 싶을까. “기자로 남고 싶어요. 의사였는데 기자로 활동한 게 아니라, 이 분야의 프로토타입(원형)이 되고 싶어요. 공정하고 상식적으로 의학정보의 필터 역할을 잘 해냈다고 인정받고 싶습니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이 남지는 않았을까? 그는 “내 것이 아니면 생각하지 않는다”고 망설임 없이 답한다. “병원 의사들이요? 부럽지 않아요. 병원에 스태프만 400명이에요. 그들은 ‘원 오브 뎀’이지만, 저는 ‘온리 원’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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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계 의학전문기자 1세대


이충헌 기자에겐 ‘방송계 최초의 의학전문기자’라는 타이틀이 붙는다. 홍혜걸 전 중앙일보 기자가 국내 최초의 의사 출신 의학전문기자 1세대라면, 이 기자는 방송계 의학전문기자 1세대다. 


이 기자 전에도 MBC와 SBS에 의사 출신 기자가 있었다. 하지만 둘 다 1년도 채우지 못했다고 한다. 지금은 그 이름을 기억해주는 이 하나 없다. KBS에도 이 기자 뒤로 의사 출신 의학전문기자 4명이 들어왔지만 얼마 버티지 못하고 본업으로 돌아갔다. 남은 건 5년차인 박광식 기자뿐이다. “그만큼 이 세계가 버티기 힘들다는 거죠.”


이 기자에 따르면 현재 언론사에 남아 있는 의사 출신 의학전문기자는 방송에 4명, 신문에 3명이다. 원래 신문에 더 많았는데 최근 들어 그 수가 적어졌다고 한다. 그 중 이 기자가 ‘선배’라고 부르는 이는 조선일보의 김철중 기자 하나다. 이진한 동아일보 의학전문기자(2001년)와 김양중 한겨레 의학전문기자(2002년)가 언론사 입사는 1~2년 빠르지만 의사로선 ‘후배’다. MBC 나윤숙 기자와 SBS 조동찬 기자도 아끼는 후배들이다. 의사이자 기자라는 공통점을 가진 이들은 끈끈한 유대감을 자랑하고 있다.


국민 건강에 필수적인 의학 정보를 다루는 의학전문기자들은 유혹의 손길에 노출되기도 쉽다. 민원도 끊이지 않고, 대학병원을 중심으로 술 접대 유혹도 많다. 이 기자는 “한 곳에 오래 있다 보면 정이 생기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이 기자는 8년 동안 골프장 근처도 가지 않았다. “민원도 받지 않고, ‘딴짓’을 하지 않으니 시청자들도, 회사 내부에서도 신뢰를 보내주네요.”


그런 노력을 인정받아 이 기자는 지난달 29일 제8회 건양의학기자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한국과학기자협회 건양의학기자상 심사위원회는 이 기자에 대해 “1세대 의학전문기자로, 취재 현장을 지키며 많은 방송보도 및 대외 활동을 통해 의학 관련 기사의 신뢰도를 높였으며, 방송계 의학전문기자의 기반을 닦는데 크게 기여한 점이 인정돼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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