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하는 중국

[글로벌 리포트 | 중국] 박일근 한국일보 베이징특파원

▲박일근 한국일보 베이징특파원

‘36명 압사’
중국 베이징(北京)에 주재하고 있는 전 세계 기자들이 1월1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정신 없이 작성해 보낸 기사 제목이다. 2014년 12월31일 밤 11시35분 중국 상하이(上海)시의 유명 관광지인 와이탄(外灘)에서 새해맞이 행사 차 몰려든 인파가 뒤엉키며 대참사가 빚어진 것이다. 


와이탄은 세계 건축 박물관으로 불릴 정도로 상하이의 역사와 독특한 풍광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황푸(黃浦)강 서쪽 강변가의 명소이다. 이곳에 서면강 건너편으로 둥팡밍주(東方明珠) 탑을 비롯 푸둥(浦東)지구의 고층 빌딩들을 한 눈에 볼 수 있어 중국의 과거뿐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홍콩에 버금갈 정도로 야경도 아름다워 낮은 물론 밤에도 늘 사람들이 운집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처럼 중국의 성장과 굴기를 상징하는 곳에서 나온 새해 첫 소식이 36명 압사였으니 전 세계의 이목이 끌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역시 중국인들이다. 중국은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집권한 뒤 ‘중화 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국정 이념으로 내세웠다. 이미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 올라선 데 이어 매년 국방력을 키우는 데도 힘을 쏟고 있다. 지난해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유치, 높아진 국가적 위상을 한껏 뽐내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시 주석은 중앙아시아를 거쳐 유럽까지 이어지는 실크로드경제벨트 구축과 동남아시아를 통해 아프리카까지 이어지는 21세기 해상실크로드를 함께 일컫는 ‘일대일로(一對一路·One Belt One Road) 구상’을 공식화하기도 했다. 세계 최대 강국이던 당나라 시대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처럼 중국인의 자긍심이 한참 고조되던 차에 중국의 얼굴인 곳에서 원시적 사고로 36명의 무고한 시민이 숨을 거뒀으니 중국인들에겐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36명 희생자의 대부분이 10대와 20대 여성들이었다는 점도 14억 인구를 더욱 안타깝게 했다. 중국 당국에서 가장 경계하고 있는 신장(新疆)위구르자치구 분리 독립 운동 세력들의 테러보다 더 많은 희생자가 생겼다는 점도 중국인들에겐 수치였다. 


사고 이후 중국에선 반성들이 이어지고 있다. 이번 사고가 중국의 현 수준을 그대로 보여줬다는 통렬한 지적이 나오고 있다. 한 사회의 수준은 결코 돈을 좀 벌었다고 이뤄지는 게 아니란 공감대도 확산되고 있다. 그동안 물질적 성장에만 치중한 나머지 소홀히 해왔던 가치들에 대해 다시 눈을 돌려야 한다는 고언들도 쏟아지고 있다. 


특히 질서 의식의 부재가 많이 성토되고 있다. 중국에선 빨간 신호등일 때도 아랑곳하지 않고 길을 건너는 사람들을 목격하는 게 어렵지 않다. 심지어 도로 역주행도 빈번하다. 이런 상황이니 신호등을 지키는 것보다 신호등을 지키지 않는 게 더 안전할 때도 있다. 신호등에 상관없이 차가 없을 때 다른 사람들과 우르르 함께 길을 건너는 게 가장 현명한 중국식 길 건너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제 중국 내부에서 평소 이런 질서 의식의 부재가 결국 이런 참사로 이어진 것 아니냐는 반성이 나오는 것이다. 


통상 몇 개월 뒤 발표하던 대형 사고 조사 결과가 20여일 만에 나온 것도 달라진 사회적 요구를 반영하고 있다. 당시 와이탄을 관리해야 하는 상하이시 황푸구의 고위 간부들이 고급 식당에서 만찬을 가진 사실이 폭로된 것도 예전에는 찾아볼 수 없던 모습이다. 평소 정부 비판적인 글을 찾아보기 힘든 중국 언론들도 이번 사고가 ‘예고된 인재(人災)’였다고 강조했다. 결국 중국공산당도 상하이시 황푸구의 당정 간부 11명에게 직무 취소 등의 징계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대중의 분노는 좀 더 높은 책임자가 자리를 내놔야 한다는 목소리로 이어지고 있다. 


이번 사고를 겪는 중국 사회의 모습은 마치 20여년 전 우리의 모습을 떠 올리게 한다. 성수대교 붕괴, 대구지하철 가스 폭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등으로 우리 사회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그러나 이런 압축 성장의 후유증과 혹독한 성장통은 우리 사회를 좀 더 성숙하게 단련시켰다. 물론 지난해 세월호 참사는 그 과정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줬다. 이제 중국도 그 지난한 과정을 시작하는 듯 보인다. 중국의 변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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