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판결은 사회적 정의와 일치하는가

[언론다시보기] 김준현 변호사·민변 언론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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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현 변호사

법원의 판결은 과연 사회적 정의와 합치하는가. 지난주 선고된 쌍용자동차 해고가 유효하다는 대법원 판결 이후 사람들이 한 번쯤 떠올려봤을 만한 물음이다.


이 질문은 대법원은 우리나라 사법제도에서 최고 권위를 가진 집단이며, 그들의 최종 판단은 정당할 것이라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대의민주주의에 따라 선출된 국회의원들이 법을 만들었다는 신뢰도 있다. 설사 법이 힘 있는 자의 입장을 반영하고 있더라도 3권분립의 원칙에 따라 독립적인 사법부가 판단할 것이라는 최후의 신념이 더해진다. 그래서 법원의 판결은 최종적이고, 그 합리성은 의심하기 어려우며, 사회 전체의 정의를 실현할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런 순진한 믿음은 항상 배반당한다. 현실에서 판결을 통해 ‘법적 합리성’과 ‘사회 정의’가 일치하는 사례를 보기는 힘들다. 


법원의 판단이 정의와 일치할 것이라는 시민들의 신뢰가 배반당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법은 순진한 믿음과는 달리 문구에 불과하다. 어떤 세력의 입장이 더 많이 반영되었느냐의 차이에 불과할 뿐이다. 얼마 전 여야 합의로 통과된 세월호특별법을 보라. 결국은 유가족의 의사보다는 힘있는 여당의 입장이 반영된 법이 만들어지지 않았는가.


쌍용차 판결의 쟁점인 정리해고제로 돌아와보자. 이 제도는 외환위기로 경제난이 극심했던 1998년 기업구조조정을 원활하게 하여 경제난을 극복한다는 명목으로 도입됐다. 정부는 외환위기 이후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빌린 자금을 2001년 경 다 갚았다. 정부와 언론은 IMF를 조기졸업했다고 선전했다. 그런데 정리해고제는 계속 유지되었다. 오히려 이후에는 노동시장 유연화라는 명목으로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법안이 마련되었다. 1998년 외환위기의 원인으로는 기업의 무분별한 차입경영, 외국투기자본의 공격 등 여러 가지가 꼽힌다. 노동시장의 경직화 때문이 아닌데도 이 나라 법제는 친기업적으로만 입법화된 것이다. 법이 만들어진 과정 역시 힘 있는 자의 논리와 일치한다. 


더욱이 법을 최종적으로 적용하여 해석하는 일 역시 현실의 힘과 직결된다. 오래 전부터 회자되는 ‘유전무죄’라는 외침처럼.


쌍용차 해고무효소송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인 ‘정리해고’와 관련된 해석도 그렇다. 근로기준법 제24조 제1항은 “사용자가 근로자를 해고하려면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가 있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법 조항에서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를 구체화하지 못한 것은 현실이 복잡했던 탓이었을 것이다. 칼로 대나무를 쪼개듯이 긴박한 필요를 열거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며, 또한 대의제 기구인 국회에서 의원들간 타협의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따라서 ‘긴박한 필요’의 판단은 사법부의 몫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사법부의 사회정의와 일치하는 판단을 기대하기가 난망인 듯하다. 


지난 2월 서울고등법원은 쌍용차 해고는 무효라고 판결했다. 이에 대해 기업들의 연합체인 한국경영자총협회는 “고등법원이 정리해고의 요건을 지나치게 엄격하게 해석했다”며 “기업들의 인력운영과 경영활동이 위축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 엄포가 통해서일까. 대법원은 경총의 태도처럼 정리해고의 요건을 폭넓게 해석한 판결을 내린 것이다.


법은 정의를 실현하는 도구여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지 않는 판결이 늘어나고 있다. 


배반당한 신뢰는 또 다른 질문을 던진다. “판결이 정의와 일치할 수 있도록 할 수는 없는가”. 모호한 법규정을 정비하고, 고위법관을 선거로 뽑으면 어떨까. 그렇더라도 결국 힘과 돈 있는 세력이 사법부를 흔드는 것은 아닐까. 그 힘은 어떻게 제어할 수 있을까. 법으로 밥을 버는 입장에서 곤혹스러운 질문이 계속 쏟아지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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