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벌받지 않는 권력'이 문제

[글로벌 리포트 | 남미] 김재순 연합뉴스 상파울루 특파원

▲김재순 연합뉴스 상파울루 특파원

브라질 사회가 요즘 국영에너지회사 ‘페트로브라스(Petrobras)’를 둘러싼 비리 의혹으로 떠들썩하다. 중남미 지역 최대 기업인 페트로브라스가 브라질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 만큼 비리 의혹이 가져오는 파장도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브라질 연방경찰은 페트로브라스와의 거래 과정에서 뇌물수수와 돈세탁 등 혐의가 드러난 기업인 20여 명을 체포했다. 최소한 14개 기업이 페트로브라스에 장비를 납품하거나 정유소 건설 사업 등을 수주하는 대가로 거액의 뇌물을 제공한 혐의를 받고 있다. 기업인들은 페트로브라스 경영진과 협상하면서 금액을 실제보다 부풀려 계약을 체결했고, 세탁을 거친 뭉칫돈이 집권 노동자당을 비롯한 주요 정당에 흘러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돈세탁 규모는 드러난 것만 4조2500억원을 넘는다. 1953년에 설립된 페트로브라스에는 창사 60여 년 만에 최악의 위기로 받아들여진다.


위기는 재계에 국한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연방경찰이 기업인에 이어 정치인도 대거 조사 대상에 올릴 것으로 알려지면서 수도 브라질리아의 정치권은 몸을 잔뜩 낮춘 채 숨을 죽이고 있다. 연방경찰이 조사 대상 선별 작업을 벌이고 있어 조만간 정치인들이 줄줄이 소환될 것으로 보인다.


페트로브라스 비리 의혹은 야당 지지자들의 대통령 퇴진 운동으로 이어지면서 대선 후유증을 키우고 있다. 대선 결선투표(10월26일)가 끝나고 나서 상파울루를 비롯한 주요 도시에서 반정부 시위가 잇따르고 있다. 시위대는 페트로브라스 비리 의혹과 관련해 대통령과 집권당의 책임을 묻는 데 그치지 않고 대선을 부정선거로 규정하며 재검표를 요구하는가 하면 대통령 탄핵을 촉구했다. 일부 시위대는 정치권에 불신을 나타내며 군부의 정치 개입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자 노동자당을 지지하는 좌파단체들은 친정부 시위를 벌였다. 좌파단체들은 대통령 탄핵 주장을 강하게 비난하면서 노동자당 정권이 추진하려는 각종 개혁 작업을 지지했다. 친-반정부 시위가 계속되면서 대선 과정에서 드러난 지역간·소득계층간 갈등이 더욱 확산하는 양상이다.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은 페트로브라스 스캔들이 국민과 국가, 기업의 관계에 변화를 가져올 것이며, 죄를 짓고도 처벌받지 않는 관행을 없애 브라질을 바꿀 것이라고 말했다. 연방경찰의 조사 결과에 따라 호세프 대통령도 일정 수준의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 올 수 있지만, 부패·비리가 사라지지 않는 원인은 제대로 짚었다고 본다.
브라질에서 부패·비리 스캔들이 터질 때마다 언론에 단골처럼 등장하는 말이 “처벌받지 않는 권력을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다. 위법·탈법 행위를 저지른 정치·경제·사회적 기득권층에 대한 처벌이 솜방망이에 그치는 현실을 지적한 말이다.


이 지면을 통해 브라질에서 작년 6월에 벌어진 대규모 시위를 다룬 적이 있다. 당시 브라질은 21년 만에 최대 규모로 벌어진 시위로 들끓었다. 전국 주요 도시의 거리는 변화와 개혁을 외치는 함성으로 가득했고, 언론은 잠자던 브라질 국민이 깨어났다고 표현했다.


시위는 대중교통 요금에 반대해 시작됐으나 나중에는 정치권의 부패·비리를 비난하고 보건·교육·치안 등 공공서비스 개선을 요구하는 국민운동으로 확산했다. 시위 참가자가 100만 명을 헤아리는 규모로 커지자 호세프 대통령은 정치 분야를 포함한 개혁과 반부패법 제정 등을 약속했다. 거대한 국민적 저항에 백기를 든 것이다.


시위의 원인을 놓고 다양한 진단이 쏟아졌다. ‘역사의 종언’으로 유명한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글로벌 중산층’의 성장을 시위의 동력으로 들었다. 새롭게 부를 쌓고 교육받은 중산층의 높아진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정부의 실패 때문에 시위가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브라질 연방검찰총장은 기득권층에 대한 분노가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것이라고 해석했다. 기득권층이 일방적으로 만들어놓은 질서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라는 것이다.


페트로브라스 비리 의혹에서 비롯된 최근의 사태가 작년처럼 대규모 국민운동으로 번질 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브라질 사회의 고질병인 부패·비리의 고리를 끊어내려는 노력에 중요한 전기가 될 수는 있다.


부패와 비리가 나라를 망치는 것은 확실하다. 부패·비리 척결은 ‘처벌받지 않는 권력’을 처벌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돼야 한다. 이는 브라질뿐만 아니라 모든 국가에 해당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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