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협 반세기 집대성 '50년사' 한국 언론 50년 궤적 담아

한국기자협회 50년사 편찬
편찬위원 8명 7개월간 작업
기협 태동부터 세월호까지
주요 사건 등 1179쪽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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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자협회(회장 박종률)는 창립 50주년을 맞아 한국기자협회의 역사를 집대성한 ‘한국기자협회 50년사’를 편찬했다. 1964년 8월17일 언론윤리위원회법 제정 반대 투쟁을 계기로 창립한 한국기자협회는 지난 50년 동안 언론의 시대적 사명에 매진하며 언론인들의 권익옹호에 앞장섰고, 바람직한 한국 언론 사회를 정립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때문에 기협의 50년 발자취는 한국 언론 전반의 기록이자 언론의 역사이기도 하다.


총 1179쪽에 달하는 50년사는 화보와 특별기획(성명·우리의 주장으로 본 한국기자협회 50년, 퓰리처상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한국기자상), 5편의 본문(한국언론의 역사와 기자협회의 의의, 저널리즘의 위기와 한국기자협회 창립, 한국기자협회 강령과 주요 활동, 사업, 운영)과 부록으로 구성된 언론 총괄서다. 편찬위원장으로 참여한 박기병 기협 고문(10·17대 한국기자협회장)과 신민형 기협 40년사 편찬위원장, 김종찬, 백병규, 이창섭 전 기자협회보 기자, 이희용 연합뉴스 한민족센터 부본부장, 김홍국 tbs 보도국장, 김지방 기협 조사연구분과위원장(국민일보) 등 7명의 편찬·저술위원은 기협 창립부터 최근까지 기협의 역사와 활동, 언론계 주요 사건을 연대별로 분류했다.

▲한국기자협회가 50년 역사를 집대성한 ‘한국기자협회 50년사’를 펴냈다. 총 1179쪽에 달하는 50년사는 화보와 특별기획, 5편의 본문과 부록으로 구성된 한국 언론의 총괄서이다.

기자협회 주도로 사이비기자 척결 운동
1964년 정부와 여당인 공화당은 언론윤리위원회법 제정을 추진했다. 사이비 언론의 발호와 무책임한 선동적 보도를 막기 위해 공적 윤리와 책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정부에 비판적인 논조를 막겠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이에 언론단체 대표들은 ‘언론법철폐투쟁위원회’를 구성해 투쟁했지만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한 일선 기자들은 8월17일 기협을 발족했다. 1967~69년에는 기협 주도로 사이비 기자 척결 운동이 펼쳐졌다. 이에 따라 △회원 자격 재심사를 통한 자체 정비와 철저한 정화운동 전개 △사이비 비행 고발 △무급 기자증 남발하는 사이비 언론기관 조사 및 대책 강구 등이 결의됐다.

자유언론실천선언운동 구심점 역할
유신의 서슬 아래 언론의 암흑기는 한동안 지속됐다. 그러나 1973년 동아일보를 시작으로 경향신문, 신아일보, 조선일보 등이 철야농성을 벌이거나 기자총회를 열어 언론자유 수호를 결의했으며 기협도 언론자유 수호 행동강령 준수를 내용으로 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어 1974년 10월24일에는 동아일보 기자 200여명이 자유언론실천대회를 개최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했다. 조선일보와 한국일보도 언론자유 수호 선언을 하는 등 11월7일까지 선언에 동참한 언론사는 모두 35개사에 달했다. 1975년에도 동아 사태는 잦아들지 않았다. 기협은 자유언론 실천운동의 구심점으로 자리 잡고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했으나 정부는 탄압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철권통치에 주눅이 든 언론계는 1976년부터 침묵에 빠졌다.

80년 언론민주화 운동과 공안정국
1980년대 들어 10·26과 함께 계엄령이 내려졌지만 기자들은 더는 침묵하지 않았다. 민주화에 대한 기대와 함께 언론자유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80년 2월20일 경향신문을 시작으로 한국일보, 동아일보 기자들은 동아·조선투위 기자들이 복직돼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기협도 이들과 함께 했다. 그러나 ‘서울의 봄’은 더 큰 비극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 12·12 사태로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는 5월17일 계엄 확대에 이어 광주민주화운동을 폭압적으로 진압한 뒤 재야 인사, 학생, 기자, 교수 등 비판 세력을 대대적으로 검거하고 나섰다. 이 시기 기협 조직이 와해되고 집행부 간부가 대거 구속되면서 모든 언론사는 숨을 죽였다. 1987년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는 해, 경찰 조사를 받던 서울대생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박종철 군 고문치사 은폐조작 폭로, 6·10 항쟁 등이 숨 가쁘게 이어지며 6·29 선언이 나왔다. 이후 회원사 기자들의 시국선언과 언론자유 수호 결의가 줄을 잇자 기협은 해직 언론인 원상회복과 언론학살 진상 규명을 촉구하며 공안 정국의 탄압에 맞섰다.

잇따른 촌지 파문에 자정운동 다짐
1991년은 언론의 부끄러운 민낯이 드러난 해였다. 한보그룹이 수서택지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정·관계에 뇌물을 뿌렸다는 사실이 폭로되며 언론인 금품 수수설이 흘러나온 것이다. 기협은 촌지 문화로부터 탈출하지 못했음을 고백하며 진정한 자정운동에 나설 것을 다짐했다. 그러나 그 다짐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보사부 출입기자단의 촌지 수수 파문이 터져 나와 기협은 다시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해야 했다. 이어 1999년에도 취재원과의 유착, 취재 과정에서 얻은 정보를 돈을 받고 국회의원에게 건넨 사건 등 부끄러운 일이 또다시 폭로됐다.

언론과 갈등 노무현·이명박 정부
참여정부 들어 정부와 언론의 갈등은 끊이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이 신문사를 상대로 직접 소송을 제기한 데 이어 정순균 국정홍보처장이 아시안월스트리트저널에 우리나라 기자들이 사실 확인도 않고 기사를 쓴다거나 촌지를 받는다는 등 언론인을 깎아내리는 표현을 해 파문이 일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가 발표한 ‘취재지원 시스템 선진화 방안’을 놓고도 언론계가 거세게 반발했으며 당시 기협은 선진화 방안 백지화를 요구했다. 2000년대에는 취재기자 폭행도 끊이지 않았다. 노동자 집회를 취재하던 기자들이 경찰에 무차별 폭행을 당했고 외국 군인들에게 탄압을 받는 일도 발생했다. 잡음이 끊이지 않은 이 시기, 이명박 대통령이 ‘프레스 프렌들리’를 표방하며 당선됐다. 그러나 신문법 폐지와 신문·방송 겸영 허용 예고, 최시중 방통위원장 내정 등 취임 전부터 파열음이 터져 나왔다. 기협은 구본홍 YTN 사장 등 낙하산 인사에 대한 항의와 함께 정연주 KBS 사장에 대한 이사회의 불법적인 해임제청을 질타했다.

박근혜 정부 해직기자 복직 요원
정권의 언론탄압에 항의하는 기자들의 수난은 끊이지 않았다. 기협은 정권의 방송 장악 기도를 폭로하며 해직 문제에 대해 항의했다. MBC, KBS, YTN, 연합뉴스, 국민일보 등도 정권의 언론 장악과 기자 해고를 비판하며 줄지어 파업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도 해직기자 복직은 요원했다. 이 가운데 한국일보에서는 대주주 장재구 회장의 배임과 횡포에 대한 기자들의 항의에 경영진이 편집국을 폐쇄하는 언론사 초유의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리고 2014년 4월16일 여객선 세월호가 침몰해 수백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취재보도 과정에서 희생자 가족과 국민에게 큰 상처를 준 기자들은 여론의 따가운 질타를 받았고 기협은 지난 9월16일 재난보도준칙을 선포하며 신뢰받는 언론으로 거듭나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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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병 50년사 편찬위원장

“기협 50년 功過 사실적으로 기록”

박기병 50년사 편찬위원장


“인류에게 있어 가장 큰 비극은 지나간 역사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다는 데 있다.” 박기병 편찬위원장(10·17대 한국기자협회장)은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의 말을 빌려 ‘한국기자협회 50년사’가 후세에 귀감이 되는 책이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그는 7명의 편찬·저술위원들과 기자협회 50년사의 공과 과를 남김없이, 사실적으로 기록하는 데 주력했다고 전했다. 박 편찬위원장을 지난 27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기자협회 회의실에서 만났다. 


-7개월 만에 책이 나왔다. 기분이 어떤가.
“먼저 흐뭇하다는 생각이 든다. 기자협회 50년 동안 기자들의 치적과 고난의 길을 기록으로 남겨놓는 것은 큰 의미가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편찬·저술위원들이 정말 많은 노력을 했다. 50년 동안의 자료를 샅샅이 찾고 정리하는 한편 지난 3월 편찬위원회가 구성된 이후 7번의 공식적인 회의를 거치며 역사가 사실대로 기록됐는지 등을 끊임없이 검토했다.”

-아쉬운 점도 있었을 것 같다.
“자료 부족으로 초창기 수난의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언론자유 수호를 위해 투쟁하던 언론인들이 끝내 대가를 받지 못하고 어려운 길을 걸어온 것을 더욱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싶었는데 그런 부분이 부족했던 것 같다. 100%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앞으로 나올 60년사, 70년사에서는 모자란 부분을 보완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50년사를 읽을 후배기자들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
“언론자유조차 수호하기 어려웠던 초창기를 지나 어느 정도 언론의 자유가 보장이 된 이후에도 일선 기자들은 언론자유를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다. 그 때문에 오늘날 이 정도 자유가 보장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후배 기자들이 앞으로 선배들이 이뤄놓은 언론자유를 바탕으로 개인의 자질을 향상하는 것은 물론 국제교류를 확대했으면 한다. 한국 언론이 세계 속의 언론으로 우뚝 설 수 있도록 50년사가 밑거름이 된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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