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민주화 시위가 주는 교훈

[글로벌 리포트 | 중국] 박일근 한국일보 베이징특파원

▲박일근 한국일보 베이징특파원

너무 얌전했다. 최근 민주화 시위 취재 차 홍콩을 찾아 시위대를 보고 든 생각이다.
실제로 현장은 이곳이 과연 1989년 톈안먼(天安門) 민주화 운동 이후 중국에서 가장 큰 정치적 항명이 일어나고 있는 곳이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조용하고 깨끗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아스팔트 위에 돗자리를 깔고 삼삼오오 모여 앉아 책을 보거나 스마트폰을 들여다볼 뿐이었다.


거리엔 쓰레기 하나 없었다. 9월 말 10월 초인데도 한낮엔 35도까지 올라가는 폭염으로 자원봉사대원들이 생수와 음료를 나눠주고 있었지만 시위대는 물을 마신 뒤 통과 뚜껑을 따로 분리 수거해 모을 정도였다. 밤샘 시위에도 불구하고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는 학생도 없었다. 1980~90년대 우리나라 학생 시위에선 필수품이나 마찬가지였던 화염병은 물론 쇠파이프나 돌멩이 하나도 안 보였다. 그 흔한 대자보도 없이 학생들은 A4용지나 붙임쪽지(포스트잇)에 자신들의 주장을 소박하게 써 붙였다. ‘센트럴을 점령하라(Occupy Central)’는 거대한 이름이 붙기는 했지만 실제로 시위는 ‘도심 차 없는 거리 행사’처럼 여겨졌다. 한마디로 양처럼 순한 시위대라 할 만 했다. 


궁금증은 도대체 왜 시위를 벌이게 된 것인가로 옮겨 갔다. 빨간 불엔 길 한번 건넌 적 없을 것 같은 이런 모범 학생들이 등교까지 거부한 채 도심 주요 거리를 점거하는 ‘불법’을 저지르게 된 과정이 의아했다. 이번 홍콩 민주화 시위는 2017년 홍콩 행정장관 직선제 후보를 친중국 애국 인사로 제한한 데 대한 반발로 일어났다는 게 일반적인 설명이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 이유일 뿐이다. 시위 현장에서 만난 홍콩 학생들과 시민들은 홍콩이 1997년 영국에서 중국으로 반환된 뒤 쌓여왔던 불만들을 쏟아냈다. 이들은 경찰과 관원들 사이에 중국식 부패가 만연해진데다 소득보다 물가가 더 많이 오르며 점점 살기가 힘들다고 하소연을 했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중국색이 점점 강해지며 홍콩의 특색을 잃어가고 있다는 불안감도 컸다. 홍콩인은 사실 자신들을 중국인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말과 생김새도 다른데다 경제적 문화적 수준의 차이도 크다. 


더 큰 문제는 이처럼 불만이 높은 데도 홍콩 정부가 이러한 시민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번 시위는 지난달 28일 새벽 1시 시민단체 ‘센트럴을 점령하라’측이 시민 불복종 운동을 시작하겠다고 선언한 데서 비롯됐다. 


‘센트럴을 점령하라’측이 이 선언을 하게 된 것은 렁춘잉(梁振英) 홍콩 행정장관과의 면담 요구가 묵살됐기 때문이다. 지난 8월31일 홍콩 행정장관 직선제 후보의 자격을 제한하기로 한 중국 중앙 정부의 방침이 정해진 뒤 홍콩 시민들과 학생들은 렁 장관과의 면담을 강력하게 요구해 왔었다. 그러나 렁 장관이 이를 계속 피하다가 수용하지 않자 결국 항명의 깃발을 올리게 된 것이다. 


더구나 렁 장관은 시위대가 주요 거리 점거에 나서자 곧바로 경찰력을 동원, 최루탄을 쏘며 이를 강제 해산하려 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 시위대는 너무나도 얌전하고 착한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무런 무기도 가지지 않고 평화적 시위를 벌이는 학생들을 향해 경찰이 최루탄 공격을 하자 홍콩 시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거리로 나왔다. 시위가 한 때 수십만명 규모까지 늘어난 직접적 계기다. 어느 순간 시위대의 가장 큰 요구도 렁 장관의 사퇴로 바뀌어 있었다. 


홍콩 민주화 시위 이야기는 우리 지도층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무리 착한 시민들과 모범 학생들이라고 할지라도 자신들의 정부가 자신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해질 경우 민초들은 들고 일어설 수밖에 없다. 국민들이 원하는 지도자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지도자다. 홍콩 민주화 시위도 애당초 렁 장관이 학생·시민들과 만나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더라면 이처럼 전 세계적 뉴스로까지 커지진 않았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선 현재 세월호 유가족이 박근혜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구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렁 장관의 전철을 밟지 않길 바란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뒤집어엎을 수도 있다. 순자(荀子)의 말이다.

박일근 한국일보 베이징특파원의 전체기사 보기

배너

많이 읽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