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소녀 렐리샤의 실종

[글로벌 리포트 | 미국] 손제민 경향신문 워싱턴특파원

▲손제민 경향신문 워싱턴특파원

“정부의 어떠한 합당한 조치로도 렐리샤의 비극적 실종은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지난 3월 발생한 8살 흑인 소녀 렐리샤 러드 실종 사건에 대해 미국 워싱턴시 정부가 6개월만에 내놓은 조사 결과 보고서의 결론은 많은 사람들을 분노하게 했다.


시 정부는 노숙인 쉼터에서 생활하던 렐리샤의 실종이 양육 책임을 다하지 못한 가족 등 개인의 책임이라고 주장했다. 보고서에는 렐리샤의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자녀 양육에 크게 신경쓰지 않았고, 쉼터와 학교에 어떻게 거짓말을 했는지 소상하게 적었다. 하지만 시 정부 공무원들이 이 아동의 실종 전 쉼터 및 학교 생활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 상당 부분 지운 채 공개했다. 워싱턴시 아동·가정사회복지국 등 기관 이름조차 지워져 있었다.


짐 그레이엄 워싱턴 1지구 시의원은 19일 보고서 작성을 책임진 두 명의 부시장에 대한 청문회에서 이러한 결론은 결국 시 정부가 아동 실종의 법적 책임을 피하기 위한 것 아니냐고 따졌다.


렐리샤의 실종은 초등학교 측에서 렐리샤가 30일 이상 결석했다며 시 아동·가정사회복지국에 통보한 3월13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유는 대부분 병가였고, ‘테이텀 박사’가 승인해준 것으로 돼 있었다. 테이텀이 의사가 아니라 노숙인 쉼터 청소부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경찰 수사가 시작됐다.


렐리샤의 어머니, 친척, 친구들이 쉼터 앞에서 ‘렐리샤를 찾아달라’며 촛불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며칠 뒤 테이텀은 워싱턴의 한 공원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자살로 추정됐다. 렐리샤는 지금도 실종 상태로 사건의 진실은 미제로 남아 있다.


렐리샤 어머니의 양육 소홀은 수사 과정에서 쉽게 드러났다. 렐리샤가 실종되기 3주 전 자신이 아이를 돌볼 능력이 안되니 쉼터의 청소부인 테이텀에게 집에 데려가 돌봐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렐리샤의 부모는 그가 1살 때 사회복지사로부터 영양실조 또는 아동학대 가능성을 지적 받았으며, 4살 때와 7살 때에도 부모의 양육 능력이 없다는 소견이 기록에 남아 있다. 


테이텀은 쉼터 아동들과 개인적 관계를 갖지 못하도록 한 규정에도 불구하고, 돈과 선물을 주면서 아이들의 환심을 샀고 렐리샤를 데려가 키웠다. 렐리샤는 평소 답답한 쉼터를 떠나고 싶다고 자주 얘기했으며, 그때마다 있지도 않은 천식 증세가 있다고 둘러댔다고 한다. 시 당국은 “개인들이 나쁘게 행동하는데 그걸 어떻게 하느냐”고 했다.


하지만 쉼터 아동을 외부인이 데려가지 못하도록 한 규정 위반을 복지당국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점, 쉼터 돌봄아동 결석시 교육당국이 이틀 내에 복지당국에 통보하도록 한 규정을 지키지 않은 점 등은 정부 대응 과정의 문제로 지적됐다. 어머니의 양육 능력에 문제가 드러난 상황에서 학생이 쉼터를 떠나 30일 이상 거짓 이유를 대고 결석하는 동안 누군가 한 사람만 더 관심을 가졌다면 렐리샤의 비극적 실종은 막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비극의 원인을 개인들의 잘못으로 돌리려는 정부와 그에 맞서 정부의 책임을 묻는 개인들의 다툼으로만 보는데 그치지 않고 이런 사건이 생겨난 구조의 문제를 볼 필요도 있다. 


렐리샤가 머물렀던 쉼터가 있는 워싱턴의 ‘워드(ward) 1’ 지역은 최근 몇십 년 사이 도심 재개발 정책으로 인해 빈곤층들이 거주 가능한 집들이 헐린 곳이다. 미국의 수도 한 중간에 800여명의 노숙인들이 있으며, 이들의 거주공간인 쉼터는 열악한 여건에 놓여 있다. 렐리샤가 노숙인 어머니가 아니라, 집을 가진 부모와 함께 살았다면 다른 사람에게 맡겨졌을까. 렐리샤가 5㎞도 채 떨어지지 않은 조지타운에 살았다면 그의 결석이 눈에 띄지 않고 한달이나 지날 수 있었을까. 


갈수록 벌어지는 빈부격차와 지리적인 분리거주 속에 쉼터에 사는 대부분 흑인들(테이텀도 흑인이다)은 절망 속에 던져진 채 산다. 범죄와 악행이 없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다. 이러한 구조에 눈을 감고, 심지어 정부의 책임에 대한 언급조차 없이 렐리샤를 둘러싼 개인들이 얼마나 나빴는지에만 주목한 정부 진상조사 결과가 같은 일의 재발을 방지할 것인지 생각해보면 답은 너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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