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증인이 되기 위해 광주에 갔습니다"

'80년 해직 언론인 증언집'에 5월 광주 취재기 실은 최유찬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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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유찬 연세대 교수

1980년 5월21일, 최유찬 동아방송 기자는 광주로 향했다. 계엄군의 총칼에 무고한 시민들이 죽어가고 있는 곳이었다. 기자라고 안전을 장담할 순 없었다. “진실보도가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사건 현장의 목격자가 되고 언젠가는 역사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 가야 했습니다.”


동아방송 기자로 1980년 5월 광주를 현장 취재한 최유찬 연세대 국문학과 교수는 최근 5·18 기념재단이 발간한 ‘80년 해직 언론인 증언집’에 취재기를 실었다. 그는 광주에서 겪고, 보고, 들은 것을 서술하며 80년 5월 신군부가 저지른 만행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당시 전두환 신군부는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 실시하면서 언론검열을 강화하고 있었다. 광주에서 전해지는 소식이 계엄사 검열단에 의해 삭제되고, 윤전기를 세워 기사를 들어내 백지신문이 나오는 상황이었다. 진실보도를 기대하기 어려웠으나 그는 현장에서 진실을 맞닥뜨리고자 광주로 향했다. 


그는 남원을 거쳐 담양으로, 담양에서부터는 걸어서 광주에 잠입했다. 그러나 광주의 취재 상황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계엄군의 총구에는 살기가 넘쳤고, 관공서도 시민들도 기자에게 협조적이지 않았다. 때론 기자 신분을 숨기면서까지 관련 사실을 수집했다. 그 과정에서 독침 사건은 물론 일가족 살해사건, 5월18일 병원 응급실에서 부상자들을 치료했던 병원 의사의 증언 등을 취재할 수 있었다. 


특히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하던 망월동 묘지에서 가족을 찾고 있는 시민을 만나 눈물로 소주 한 잔을 나누어 마신 일은 그의 기억에 깊이 남아 있다. 피와 죽음, 통곡과 눈물이 한 데 뒤엉켜 있는 그곳에서 그는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고, 진실보도에 대한 의지를 더욱 굳건히 다졌다. 


무엇보다 강렬했던 것은 광주가 계엄군에 의해 완전히 진압된 5월27일, 광주 시내를 돌아다니며 취재한 일이다. 새벽 5시, 진압이 어느 정도 마무리 된 즈음 팔에 보도 완장을 차고 손을 머리에 얹은 후 동료 기자들과 길을 나선 그는 시내를 돌아다니며 쓰러져 있는 사람과 군인, 사복경찰을 목격했다. 그리고 ‘청소’할 사람들 틈에 섞여 도청 내부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그곳에서 총에 맞은 시체와 피로 물걸레질을 한 듯 새빨간 복도,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의 죽음을 눈에 담았다. 정식으로 취재를 요청하고 들어간 YWCA 건물에서는 군인 서너 명이 총을 들고 그의 뒤를 따랐다. 시민군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살아 있다면 그대로 총알받이가 될 수 있는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최 교수는 군인이 지켜야 할 국민을 앞세웠다는 것에서 그 수준을 알 수 있었다고 했다. 


최 교수는 취재를 바탕으로 최대한 절제된 기사를 썼다. 몇 명이 죽었는지 추정조차 할 수 없어 눈으로 확인한 시체의 수만 헤아렸다. 누가 봐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만을 쓰려고 노력했다. 그럼에도 많은 기사가 검열의 도마에 올랐고 삭제됐으며 정부가 조작한 사건들에 가려졌다. 그리고 두 달 뒤, 그는 많은 동료들과 함께 해직됐다.


그가 보는 지금의 언론은 어떤 모습일까. 담담하게 말을 이어가던 그는 질문을 듣고 얼굴을 굳혔다. “지금의 언론은 언론이 아닙니다. 유력 언론 매체가 진실보다는 권력에 휘둘리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언론의 수준은 제가 취재했던 1980년대 이전보다도 한참 떨어지는 단계에 있습니다. 자기 소신껏 제대로 보도하십시오. 기자는 진실을 알리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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